중국 문벌귀족의 가문이자 당나라 황실의 성씨이기도 했던 농서 이씨의 후예인 연안 이씨는 농서 이씨 시조 노자의 후예이자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초대 황제였던 농서 이씨 중시조 흥성제 이고의 후손이다. 따라서 연안 이씨의 비조는 노자의 조상인 고요이며, 도시조는 노자이다. 당나라 황실과는 종친 관계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 이무(李茂)는 당 고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삼국 시대인 660년,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백제 정벌에 참여해 시염성(鼓鹽城)에 식읍 1,000호를 받고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신라의 문무왕이 높은 벼슬을 제의했지만 이무가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國賓)으로 예우했다.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이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반대했다. 구전(口傳)으로는 그 뒤로 백제의 여인과 혼인하고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이무의 아들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가 그 후손이 다시 발해를 거쳐 신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고려 전기 이전에는 상술했듯이 당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에서 갈라졌다 하여 똑같이 농서 이씨라 불리기도 하였고, 중기에는 염주·염성 이씨 또는 오원 이씨라고도 불렸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많다 보니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파를 따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 연안 이씨 관동파 - 동촌 이씨) 한편 성주 이씨에서 갈라진 신 농서 이씨가 있는데, 성주 이씨였던 이승경(李承慶)이 고려 말기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원나라 조정에서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기 때문에 생긴 본관으로 연안 이씨의 연원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다. 즉 연안 이씨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생긴 당 황실의 농서 이씨와도 큰 관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