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 남북국 시대 이무 - 연안 이씨 시조. 당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 태종무열왕 7년에 소정방의 부장으로 신라에 와서 백제를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또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이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이무가 반대하는 등 공이 커 시염성에 식읍 700호를 받고 백작에 봉해졌으나 문무왕 때 김유신이 "식읍을 1,000호로 올리고 후작에 봉해야 한다"라고 청하니 문무왕이 윤허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제의하였으나 이무가 극구 사양하니 국빈으로 예우하였다고 전승에 나와있다. 또한 경북 군위의 효령사(장군당)는 김유신과 소정방 그리고 대사마 좌위 중랑장(大司馬 左衛 中郞將) 이무를 기린 곳이며 야사에 세 사람이 장군봉에 올라 “이제 삼국 통합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주민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정초, 상원과 단오에 제례가 있다. 소부감판사공파 등 일부 파에선 연안 이씨 시조 이무의 시호가 고려 명신 도첩과 부록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문청공(文淸公)이라 전한다. 묘는 연안군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과 북한이 서로 오갈 수 없으므로 연안 이씨 남계 후손들이 현재의 국립대전현충원의 위치에 단소(壇所)를 정하였다. 그러나 해당 묘역이 국립대전현충원의 위치로 정해지자 정부는 연안 이씨 시조 단소를 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연리 문중에서 이무는 삼국통일에 공헌하였고, 나당동맹에 주도적으로 공헌해서 국가 존폐 위난의 계기를 슬기롭게 해결하신 역사적 인물이라며 진정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묘소 존치 재가가 떨어져 단소(壇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경[추원보] - 발해 무왕 때 북우장군을 지냈으며, 경덕왕의 장인인 김의충과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나라와 평화책을 제시하고, 선대의 신원 복관을 요청하였으며, 발해의 건국을 인정받고, 친선을 도모했다. 이에 당 현종이 이경을 우림장군에 제수하였으며, 이경은 다음 해에 발해로 돌아와 좌윤에 제수되었다. 이윤원[추원보] - 태위장군 이일원의 아들로 발해 선왕 때 남좌장군으로서 양주절도사 조공과 순천장군 김웅원과 함께 왕병을 모아서 단주절도사 이사도가 일으킨 난을 평정하였다. 이충식[추원보] - 발해 출신으로 발해가 망하자 신라로 귀순하여 경애왕 때 창부원외랑을 지냈다. 박술홍과 함께 부사로서 후당에 파견되어 황제로부터 겸시어사를 제수 받고, 후에 고려 광종 때 연안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묘는 연안군 용각산에 있다고 한다. 고려 계보가 삼별초의 난 때 실전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현재는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각 파의 중시조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을 신분 정도만 간단히 유추하고,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 예로 상서좌복야 등을 지낸 김의공의 처가 연안 이씨라고 전하는데, 부인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도감판서를 지낸 승중(承中)이며, 조부는 제학을 지낸 충건(忠健), 증조부는 소감을 지낸 유인(裕仁)이라고 한다. 여기서 김의공의 처 연안 이씨는 1117년 생이므로 증조인 이유인(李裕仁)은 대략 1000년대 중반 시기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인(李裕仁)은 현재 밝혀진 연안 이씨의 파들 중 가장 활동 시기가 빠른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의 활동 시기보다 이전에 활동한 인물로 역시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또 고려 성종이 “쇠로 말하면 좋은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鐵中錚錚)”라고 표현한 고려 현종 13년에 졸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을 지낸 이주헌의 증손이자 선종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소보를 지낸 이공저의 본관이 연안(농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생년이 고려 문종 6년임을 보아 각 파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로 추측되나 역시 확실히 고증할 방도가 없다. 이양[추원보] - 병부사 이예의 아들로, 후당에 사신으로 가서 겸시어사에 제수된 이충식의 손자이다. 성종 7년에 좌보걸 겸 지기거주를 지냈으며, 이후 병부상서 등을 지냈다. 좌보걸 겸 지기거주를 역임할 당시 봉사(封事)를 올려 민생의 안정을 꾀했다. 이원정[추원보] - 元挺, 일명 元. 정국공신 이제선의 손자이자 한림학사 이신의 아들이다. 현종 때 호부상서와 좌복야, 검교태자태보 등을 지냈다. 아들은 참지정사 이표이다. 이인정[추원보] - 仁挺. 이원정의 동생으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정언과 이부상서, 평장사와 문하시중 등을 지냈다. 여담으로 연안 이씨 추원보에는 이인정이 1047년에 급제한 것으로 나와있으나, 문과 방목에선 1046년에 급제했다고 나와있다. 참고로 경주 이씨 평리성암공파 파조 이인정(李仁挺)과는 동명이인이다. 이원수[추원보] - 조부는 이부상서 이자림, 아버지는 병부상서 이협이고, 평장사 이원장의 동생이며, 이공수의 형이다. 본인은 이부상서와 문하시중 등을 지냈다. 아들은 호부상서 이하이고, 손자는 문하시중 이경필과 하정사로서 요나라에 다녀온 평장사 이덕윤이다. 이욱[추원보] - 평장사 이원장의 아들로 1076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부상서를 지냈다. 부인은 봉어첨사 김해군 김렴의 딸인 계림군부인 김해 김씨이다. 또한 태자첨사공파의 중시조인 이습홍의 조상이다. 이신[추원보] - 참지정사 이표의 아들이자 소부감판사공파의 중시조 이현려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호는 청계(淸溪)이며, 인종 15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판이부상서와 상서성의 우복야와 좌복야를 지냈다. 이계원[추원보] - 아버지는 인종 16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한 이대유이고, 동생은 검교중랑장 이계우이다. 본인은 의종 16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부상서를 지냈다. 이안군 -顔君, 초휘는 顔.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의 아들이자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와 벽상삼한삼중공신 수태사를 지냈다. 이회[추원보] -원종 때 사람으로 아버지는 밀직부사와 첨의찬성사를 지낸 이곤이며, 어머니는 철원군부인 동주 최씨이다. 본인은 첨의평리를 지냈다. 이분희 -汾禧. 충렬왕 때 사람으로 대장군 이송(李松)의 아들이다. 왕을 호종해 위사공신에 올랐다. 이때의 공으로 지복주사였던 연안을 석주로 승격시켰다. 또한 원나라 공주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추밀원부사, 지주사, 지밀직사사를 지내다 김방경을 무고한 죄로 가산이 적몰되었고, 1278년에 바다에 던져져 죽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 이분희전에는 그의 기록과 함께 그의 본관인 염주 이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배위는 함양 박씨로 판이부상서 추밀사 응천군 박신유의 딸이고, 고려사와 연안 이씨 추원보에 의하면 아들인 이장(李璋)은 지밀직사사를 지냈고, 딸은 도첨의중찬 한강의 아들인 보문각제학 한사기에게 출가했다고 한다. 이습 -이분희의 동생으로 초명은 이분성이다. 1240년에 태어났으며, 원종의 총애를 받아 상서도성의 우승에 올랐고 충렬왕 때 지신사를 지냈다. 성격이 곧고 깨끗하여, 정령(政令)이 시행될 때 백성들에게 불이익이 있게 되면 간쟁을 하였고, 내관들의 청탁을 모두 거절하여서 내관들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과 후궁 사이의 딸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국서(國壻)로 불렸다. 그러나 이습 역시 김방경을 모함했다는 죄로 1278년에 죽었다. 이경무 -조부는 검교태자첨사로서 상약국 봉어를 지낸 학옹 이습홍이다. 아버지 이극영은 판태의감사를 지냈으며, 본인은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냈다. 아들은 중정대부 대호군 이승안이다. 부인은 군부인 성주 김씨이다. 이효신 -종2품 봉익대부 판도판서. 이아자첩목아 -이효신의 장남. 원나라로 귀화했다. 후에 원나라에서 연안군으로 봉해졌다. 이엄 -지밀직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안군. 1등 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충혜왕 때 밀직부사가 되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은 뒤 충혜왕에게 강간을 당한 경화공주가 창피하여 원나라로 가기 위하여 말을 구하려 하였다. 이때 충혜왕이 이엄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경화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충혜왕이 이엄과 윤계종(尹繼宗)에게 마시(馬市)를 금하게 하여 말을 팔지 못하게 한 점으로 보아 충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엄은 1340년 충혜왕이 원나라 형부(刑部)에 구금될 때 폐신으로서 이몽가(李蒙哥) 등과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342년 조적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책봉된 후 1346년에 졸했다. 이운 -芸, 雲. 연안군 이엄의 동생으로 기철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잘못을 항소했다. 관직으로는 지신사와 판밀직사사 등을 지냈다. 형과 같이 조적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권 -판삼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성군, 오원부원군.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거쳐 1350년에 경상·전라도도지휘사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고, 이듬해에는 만호 인당(印瑭)과 함께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았다. 1352년에 조일신의 난이 일어나자 조일신이 왕을 위협하여 어보를 꺼내 스스로 우정승에 제수하고, 정천기를 좌정승으로, 이권을 판삼사사로, 나영걸을 판밀직사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민왕 1년 9월에 조일신의 난이 실패하자 정천기와 조일신 등은 주살되고 이권은 일당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가, 그해 10월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354년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고우(高郵)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하여 서경의 수군 300여 명을 이끌고 연경으로 갔으나, 남쪽에 있는 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진 탓에 힘껏 싸우다가 최원(崔源)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해에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인계 -1279년 생으로 감찰시승 이병의 장남이자 문하좌시랑 이인후의 형이다. 관직은 시랑이다. 이인계는 판삼사사 공량공 이수산을 포함하여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인계의 장남인 이수창은 판도정랑공파 중시조 이백연과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아버지이다. 이인후 -충숙왕 때인 13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좌시랑을 지냈으며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아들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 이인후를 파시조로 하는 대장군공파 좌시랑공파의 집성촌이 있다. 연안 이씨에서 분적한 해주 이씨 시조 해신군 이녕이 이곳 출신이라 전해진다. 또한 궁원록에는 이인후가 이분양의 아들이자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삼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수산 -이인계의 아들로 밀직부사로서 추성익대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해졌다.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종적을 감추어 죽음을 면하였고, 1354년에 첨의평리를 거쳐 찬성사에 올랐다. 1355년 12월 행성낭중으로 쌍성에 가서 이주민과 원거주민을 구별하여 호적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 하였다. 1356년 친원파 기철이 포살되자 그 일파로 유배되었으나 1362년 12월 수춘군(壽春君)으로서 동북면도순문사로 나가 여진족을 평정하여 경계를 정하였다. 이후 판삼사사에 올라 수춘부원군(壽春府院君)이 되고,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에 봉해졌으나 신돈에 의하여 한때 숙청당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을 즉위시키려는 이인임의 의견에 판삼사사로서 혼자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종친 가운데에서 후계자를 뽑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호는 공량(恭良)이다. 아들은 대학사를 지낸 이염과 이희다. 이정공 -중정대부 대호군 이승안의 아들로 전보도감 판광을 지냈으며,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버지이다. 사후 광정대부 문하평리와 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남평 문씨로 증 지밀직사사 문유근의 딸이며, 수사공 좌복야 문효식의 증손녀이며, 안산 김씨 문하시중 김위의 외손녀이다. 이종실 -종2품 봉익대부 호조전서. 이효신의 손자이며 종3품 중현대부 사복시정 이광의 아들이다. 이종미 -종3품 중현대부. 서운관부정을 지냈다. 이종무 -자덕대부 공조전서, 증 숭정대부 좌찬성. 이원발 -상호군 이정공의 아들로 초명은 총(寵), 호는 은봉(隱峯), 부인은 중랑장 김남보의 여식인 송양군부인 성천 김씨이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과 같은 연배로 목욕도 함께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공민왕 때 전공판서와 상호군 등을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평소에 덕과 의리를 같이 하던 친한 원천석이 그의 집에 와서 5~6일 정도 유숙도 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원천석과 함께 상신으로 불렀으나 여러 부름에도 움직이지 않고 최후에 우의정에 제배하였으나 불사이군 충절을 지키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뒷날 이귀령이 공을 세운 것이 많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에 증직되었다. 묘는 원래 고산현 소주치에 있었으나 후에 용인 구수동 해자원으로 옮겼다. 아들은 좌의정 이귀령과 판서 이귀산이다. 이승백 -평장사 이안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용중랑장 이양, 어머니는 안주군부인 강씨이다. 누이는 당악 김씨 판도시랑 김원계에게 출가했다. 이승백은 고려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윤두수의 평양지에는 태조 원년에 문과에 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 평안도 도순문찰리사를 지냈다. 부인은 평양부원군 조위의 여식인 평양 조씨이며, 아들은 광정대부 문하찬성사와 개성부윤에 추봉된 이화와 진사 이룡, 평안도 신성군영 천호를 지낸 이조, 공조전서를 지낸 이음이다. 이제경 -호조전서 이종실의 아들로 공조전서 겸 춘추관사를 지냈다. 소부감판사공파 중 전서공파의 파조이다. 이념 -판삼사사 이수산의 장남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의시사와 예의·전공의 판서 및 밀직부사, 첨서밀직사사를 역임했다. 공양왕 땐 지밀직사사가 되었다. 이때 왕에게 중방(重房)의 처벌을 강요하다가 순군에 갇히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의 도움으로 합포에 장배로 그쳤다. 얼마 후 경상도 도절제사로 복귀하였다. 조선 건국 후 삼사우복야를 거쳐 정당문학으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를 겸해 공민왕의 금인을 반환하러 명나라에 갔으나 황제로부터 "예를 갖추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고 돌아왔으며, 앞으로 조빙을 못 하게 만든 죄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등용되어 1394년에 문하평리로서 표전과 예물을 가지고 명나라에 갔으며, 신도 궁궐 조성도감의 판사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춘추관 대학사로 궁궐에 말을 탄 채 들어갔다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충군(充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그러나 정종 2년에 상왕에게 자주 찾아가 잡언(雜言)을 함부로 하여 춘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여담으로 이념이 죽자 태종은 조회를 정지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예조좌랑 권보와 김훈이 명을 어기고 조회를 정지하지 않아 이들을 순금사에 가두었다가 3일 만에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척 -우왕 6년,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했다. 조부는 통례문부사공파 중시조 이지이며, 아버지는 중현대부 공조전서 전농정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좌복야 연성부원군에 증직된 문창공 이계손이다. 어머니는 계림부부인 경주 이씨이며 고려 김해후 문하시중 이제현의 차녀이다. 고려 때는 삼사좌사를 지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정종 1년에 병조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횡성군 조무의 여식인 횡성 조씨다. |
조선시대 이귀령 -자는 수지, 호는 계은, 시호는 강호다.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고려 말에 판선공시사 등을 지냈다. 동생인 이귀산과 함께 태조와 조선이 세워지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태조가 즉위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형조전서 등을 지냈고, 태종 때 판공안부사와 판승녕부사, 판좌군도총제부사 등을 지내다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후 검교우의정, 검교좌의정에 올랐는데 태종 16년에 좌의정으로 치사하였다. 94세 나이로 졸하였다. 여담으로 이귀령의 둘째 아들인 이돈이 조선 최대의 음부(淫婦)인 유감동과 간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돈은 유감동의 죄상을 알면서도 안연하게 간통하면서 그의 아버지인 검한성 유귀수의 집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에 사헌부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벌에서 면죄되었다. 이귀산 -자는 흥서이며 호는 괴은. 봉익대부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좌의정 이귀령의 동생이다. 도호부사 이속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전라도관찰사와 경성수보도감 제조, 경상도관찰사, 개성부유후,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직 당시 사헌부에서 이귀산이 찬성사 이천우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탄핵하니 태종은 이를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한 태종이 이귀산에게 경상도관찰사를 제수하였을 때 사헌부에서 이귀산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상소하여 경상도에 가지도 않고 파직되었다. 이후 자헌대부 호조판서와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령현부인 고령 김씨 사이에서 이속을 낳았으며, 장인은 문하평리, 예부상서, 판개성부사 등을 지낸 익대공신 고양부원군 김남득이다. 이귀산은 만년(晩年)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 그루의 괴목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이라 하고, 삿갓을 쓰고 밭을 갈며 강가에서 낚시하며 보냈다고 전해진다.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으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묘소가 있었으나, 골프장 건설을 위해 파묘하였다. 묘갈은 1831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비문은 19세손 가선대부 전 궁내부특진관 이의덕이 짓고, 17세 방손 통훈대부 전 중추원의관 이병욱이 썼다. 이장림 -1378년에 충의교위 평안도 신성군영 천호 이조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문하평리 이승백이다. 본인은 문과에 합격하여 자헌대부 병조전서를 지냈다. 부인은 문하시중 이인임의 장녀 성주 이씨다. 슬하에 아들 이보를 두었는데, 이보는 현재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이석형 -자는 백옥, 호는 저헌, 시호는 문강, 4등 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이다. 태종원종공신 증좌의정 이회림의 아들이며, 조부는 개국원종공신으로 좌찬성에 증직된 이종무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연일 정씨로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연원군 이숭원과 같이 대표적인 훈구파였으며, 세종 때 생원시, 진사시, 식년문을 27세의 나이로 1년에 세 번 장원하였다. 1년에 삼장원 한 일은 과거 제도를 실사한 이래 없었던 일이다. 이에 훗날 세조가 궁녀에게 삼장원가를 짓게 하여 술을 마실 때 마다 부르게 했다. 이석형은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 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려사를 편찬하고, 세조 때 한글로 논어 구결을 만들기도 했으며 대학연의 등 유교 경전을 정리했다. 전라도, 황해도의 관찰사와 판한성부사,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조선의 호패법을 정착시키고 조선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인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를 제정한 사람이다. 또한 이석형이 나라 녹을 먹는 몸으로 사육신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가 죽을 뻔 했으나 세조가 눈감아줬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8대 문장가이며, 그의 후손 중에 정승만 8명, 부원군이 3명, 3대 연속 대제학을 포함해 총 6명의 대제학이 나왔으며 판서만 37명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1~2등을 싹쓸이한 이귀, 이시백, 이시방 부자도 그의 후손이며, 정조가 늘 저서를 끼고 살았다는 월사 이정구도 그의 후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후손 중엔 역적이나 탐관오리가 없이 깨끗 청빈하기까지 했다. 이속 -호조판서 이귀산의 아들이며, 간택 제도를 만들게 한 일등공신이다. 춘천군수로 재직 당시 태종의 혼담을 거절했다가 노비로 전락되었다. 이숭원 -3등 좌리공신. 이백겸의 손자이며, 예조판서 이보정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핵심인물로서 세조 때 대사헌까지 지냈다. 또한 성종 즉위의 공으로 좌리공신 3등에 올랐으며 종2품 가선대부 연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1485년 우참찬이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좌참찬이 되어 정헌대부에 올랐다. 1489년에 다시 형조판서를 지낸 뒤 149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중종 때는 청백리에 녹선되고, 1648년엔 지례의 도동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공이다. 그의 후손들은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대대로 세거했고 독립운동가 여럿을 배출했다. 이숙기 -1등 적개공신, 2등 세조원종공신, 4등 좌리공신. 평양판관 등을 지내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강순(康純) 휘하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실록에 이시애의 난에서 반란군을 이숙기와 남이가 살상한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많다고 나와있다. 이 공으로 종2품 가정대부로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후에 자헌대부로 승진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곤 -자는 자정, 호는 녹창이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인문의아들이다. 성종 23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헌납을 지내다가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 때 윤은보와 함께 심문받고 장 70대의 벌을 받았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으로 봉해졌다. 이때 이곤이 반정 주모자에게 아무 공로도 없이 울면서 공신에 끼어 달라고 청탁하였기에 이를 기롱하는 말인 ‘정곡공신(正哭功臣)’이라는 말이 나왔다.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밀양부사가 되었다. 밀양부사로 재직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밀양과 같은 큰 읍을 다스림에 부적합한 인물로 체직(遞職)을 청하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조광조 등 사림파의 주장에 의해 부당하게 책봉되었다는 이유로 공신 위호가 삭제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적 되었다. 이후에 이곤이 장례원판결사·여주목사·철원부사 등을 지낼 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는데 정부에서 검시하고 수사한 결과 노비에 의해 독살되었음이 밝혀졌다. 참고로 이곤의 비석은 태양 안에서 날개를 높이 펴고 비상하는 삼족오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묘표 양식은 이곤의 묘표와 박운의 묘표, 변안열의 묘표에서만 확인되는 매우 희귀한 양식이다. 이국주 -1등 적개공신 이숙기의 손자로 이천현감을 지냈다. 초배는 민침(閔琛)의 딸인 여흥 민씨로 관찰사 이우민 등 2남 1녀를 두었다. 나이가 들어 상처했는데, 아들 이우민이 홀몸이 된 자신에게 오히려 비안 박씨를 소개하고 계모에게도 효를 다했다고 한다. 이국주는 계배 박씨에게서 아들 이호민을 포함해 3남 1녀를 두었고, 이호민은 대제학, 좌찬성 등을 지내면서 집안을 빛냈고, 이호민이 나라에 기여한 공이 커서 이국주는 사후에 연선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언침 -사림의 인물이다. 이속의 손자인 이인충의 증손으로 153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 때 장령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순창군수로 나갔다. 그러나 1547년에 장미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우울하게 지내다 죽었다. 그 후 1570년에 직첩을 환수받았다. 이후백 -자는 계진, 호는 청련·청련거사, 시호는 문청(文淸). 1567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가 죽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냈다. 또한 김귀영과 함께 대제학의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김귀영이 대제학이 되고 이후백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이 되자 많은 조정 사람들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호조판서 재임 시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흥의 문회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여담으로 연안 이씨 인물 중 유일하게 택리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호민 -2등 호성공신이자 연릉부원군. 홍문관, 예문관 모두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때 적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선조의 착잡한 심경을 절실하게 표현한 시인 『용만행재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聞下三道兵進攻漢城)』을 지었다. 또한 이호민은 명나라로 건너가 원군을 요청한 덕에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왜란을 끝낼 수 있었다. 선조가 양위를 하려 할 때 광해군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죽을 뻔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광해군을 밀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독재와 영창대군 살해에 반대하다 귀양갔다. 인조반정 후 복권된다. 시호는 문희다. 이광정 -2등 호성공신이자 연평부원군.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예조판서, 개성유수,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을 맞이하는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사신으로도 다녀왔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해 강화도로 갔다가 병환으로 죽었다. 인현왕후의 진외증조부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 이주가 여러 사료와 가첩 등을 모아 족보를 준비하다 죽자 아들 이광정이 그 뒤를 이어 1605년 연리 사대파 중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여 이홍로에게 초간본을 보낸 다음 이홍로가 청백리 이기설에게 질정을 받아 ‘을사보’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엽 -태자첨사공파 중의 금성공파 파조. 종1품 찬성 이문회의 증손으로 이귀령의 곤손이다. 무과 급제한 후 금성현령을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로 참전하였다. 한산도대첩에서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혀 항복을 하라고 협박당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으니 관백에게 압송하여 왜의 본영까지 납치되었다.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엽의 용모와 기개가 아름답다고 느껴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비단 등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이엽은 조선인 포로들과 받은 비단을 팔아 배를 산 다음에 탈출하자고 계획을 세운 후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다시 추격을 받아 해중에서 스스로 배에 칼을 꽂으며 바다로 떨어져 자결했다. 이 때 적군이 바다에서 이엽의 시신을 끌어내어 환열한 뒤 거리에 걸었다고 한다. 이엽의 현손 이세온은 이를 고지에 작성하였고, 이 고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소를 써서 숙종에게 올린 결과 그 공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보 -조선의 의병장이자 이귀의 형이며 소부감판사공파 중 지평공파의 파조다. 이보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마면 사람인 소행진과 함께 의병 400여 명을 모집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군량과 병기를 마련한 후 금산에 주둔한 왜진으로 향하였다. 당시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려고 금산을 거쳐 배티재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군 1만 6,000여 명이 배티재를 넘으려 할 때 광주목사 권율이 이끄는 1,500여 명의 전라도 군사들과 소행진과 이보가 이끄는 부대를 비롯한 농민 의병군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보와 소행진은 4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온종일 수적으로 우세한 왜병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되었으며 묘는 익산에 있다. 이귀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1등 정사공신이다. 서인의 영수이다. 남한산성을 높게 올렸고, 호패법을 재정비해 군역 대상자를 확실히 했으며, 만주족에 대한 각종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다르게 지천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였다. 후일 사계 김장생과 함께 인헌왕후 구씨의 상에 기년을 주장하다가 파직됐었으나 정묘호란 때의 비상시국을 조선이 잘 넘길 수 있도록 온힘을 다했다. 또한 1624년, 개성유수로 재직 당시 건장하면서 용감한 자를 모집하여 화포를 연습시켜 어영군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어영청의 시초이고, 이귀가 어영사로 임명된 것이 어영사 제도의 시초였다. 더불어 이귀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조선의 방어전략을 담은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기록했는데 이 문서는 총 3권이며,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 버클리의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씨 부인 -여류시인. 부사 신순일의 부인으로 이정현(李廷顯)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글짓기를 좋아했으며 시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주역과 이백의 글을 필사했으며 유집이 1권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거즉사가 있으며 〈실제(失題)〉 1편이 전하는데 비오는 날 자신의 아름다웠던 청춘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이정구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를 이르는 말인 월상계택의 '월'이 그를 일컫는 말이다. 월사집을 남겼고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냈다. 많은 명문과 그림을 남겼으며 해동명신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경기도 가평군에 묘소가 있다. 이귀의 아버지 이정화와 육촌형제간이지만 이귀보다 7살 아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중국어에 능하여서 어전통관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으며, 양호 사건과 정응태 무고사건에 조선 조정이 휘말려서 명나라에게 곤혹을 치르게 생겼을 때 이정구가 명나라 조정에 상신한 주문으로 겨우 혐의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 국왕의 충간의담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한다고 한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자 세자이사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시호는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인 문충(文忠)이다. 여담으로 조선 문인 최초로 중국에 책을 발간한 인물이다. 이유길 -어린 나이에 명량해전에 출전해 이순신 밑에서 전공을 세우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일어날 때 우영장으로서 명나라 원군으로 갔다 만주에서 전사했다. 그가 오랑캐에게 포위될 때 피로 "3월 4일 죽었다"라고 삼베에 적어 말에 매어 보냈다. 주인 잃은 말이 만주에서 1,000km를 사흘 만에 달려 그의 고향집에 와서 슬피 울고 절명했다고 한다. 말을 묻은 곳이 파주 의마총이다. 의마총은 현재 파주시 지정 유적이다. 이유길은 영조 대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됐다. 이경엄 -조선 중기의 문학가. 연천군. 본은 연안,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이다. 연릉부원군 이호민의 아들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고 연천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문집으로는 『과정습유(過庭拾遺)』를 남겼다. 시조 15수와 가사 사천귀전가(斜川歸田歌)가 전한다. 이홍로 -연성군 이곤의 증손으로 157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는 영의정 기자헌의 누이로 행주 기씨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서 선조를 호종하다 도망을 가는 등 여러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후에 다시 함경도종사관, 충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재차 탄핵되어 평안북도 강계와 제주도 등으로 귀양갔다. 제주도에서 해배된 후 풀려나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608년 유영경 등 소북의 일파로 몰려 다시 제주에 유배된 후 사사당하였다. 1612년에 유영경과 김대래와 함께 부관참시되었다. 또한 광해군에게 역신으로 낙인되는 바람에 가문이 풍비박산나는데 아들 이승원, 이승형은 유영경의 아들 유열과 함께 연좌되어 처형되고 남은 아들 이승업마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다행히 이승업에겐 아들 2명이 있었고 그 중 이여주는 이승원에게 입양된 뒤 안악군수를 지내 세대를 이어갔다. 이홍로는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신원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시백 -조선 고전소설 박씨전의 주요 인물이며,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1등 정사공신 이귀의 아들로 본인도 2등 정사공신에 올랐다. 시호는 충익이다. 병자호란 때 화살을 맞으면서도 남한산성을 지켰다. 아버지 이귀에 이어 2대에 이은 충정이었다.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였으며 서인의 영수로서 예송논쟁을 이끌었고 영의정을 지냈다. 여담으로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시백은 이경여와 함께 반대하며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술자리를 만들어 이시백을 불러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은 뒤 이시백이 "신은 술을 잘 못하고, 병이 있어 더욱이 못합니다"라고 답하자 인조가 "그 병은 남한산성을 지키다 생긴 병이다"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조는 다시 이시백의 자녀가 몇 명인지 묻고,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 나라에 충성하려면 무과라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부친의 공을 잊지 못한다.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바란다."라고 자녀들이 과거를 보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한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시백의 증손인 이하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이에 이하는 능지처참 되었고, 후에 신원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하의 동생인 이척과 아들 이명구 등 일가가 죽거나 귀양을 갔고, 이들의 처는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여순(李女順) -이귀의 장녀로 1587년에 태어나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자점의 형인 유학 김자겸과 혼인하였다.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두 사람은 혼인 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 함께 불도를 닦는 도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김자겸에게는 오언관이라는 서얼 출신의 친구가 있었는데, 오언관은 김자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부부와 함께 수행을 하고 불법을 논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김자겸이 1608년에 요절했는데, 이때 오언관에게 “내가 죽더라도 집에 드나들며 내 아내와 불도를 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수년간 오언관은 이여순(李女順)의 집을 드나들며 불경을 가르쳐 주었다. 1614년에 오언관이 경상도로 낙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여순(李女順)은 함께 덕유산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가 된 후 이명을 예순(禮順)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예순비구니와 오언관의 간통 사건으로 둔갑해 광해군이 직접 심문하는 일까지 일어났는데, 오언관이 강변칠우 사건의 범인인 박치의로 오인돼 잡히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에 오언관과 함께 이예순(李禮順)도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에 이귀는 딸을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북인들에게 극렬하게 공격당했다. 그러던 와중 오언관이 의금부에서 공초를 받던 중 극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예순(李禮順) 역시 처형될 뻔하였으나 광해군에 의해 방면되었다. 그 후 예순비구니는 왕실 비구니원인 자수궁에 머물렀고, 광해군의 정실 문성군부인 류씨와 김개시 등의 왕실 여성들로부터 생불로 칭해질 정도로 깊은 신망을 얻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예순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이라 일컬으며 신봉함이 비할 데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김개시와는 모녀지간을 맺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했다. 그러나 이예순(李禮順)은 광해군을 내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은 서인세력을 규합해 광해군의 폐위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를 눈치 채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자, 예순비구니는 광해군의 측근인 상궁 김개시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이귀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김개시는 이예순(李禮順)의 부탁을 받은 직후 광해군에게 "충신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잘못된 조언을 던졌다. 이에 광해군은 이귀 등 반정세력에 대한 처벌을 보류하였고, 반정세력은 거사 시일을 앞당겨 인조반정을 성사시켰다. 반정 후 궁궐을 나온 그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하는 등 불교 진흥에 남은 생을 바쳤다. 동대문 밖 청룡사와 도봉산 회룡사의 중창 불사를 그녀가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1657년에 71세의 나이로 입적하기까지 비구니 이예순(李禮順)의 신앙과 행적은 광해군일기, 어우야담, 공사견문록 등 비교적 많은 곳에 전해 온다. 이예순(李禮順)은 당시 일반적이던 도피로서의 여성 불교가 아니라 여성과 불교에 적극적인 힘을 축적한 유래없는 역사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시방 -이귀의 아들로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다. 판의금부사, 호조판서를 지냈다. 제주 목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광해군이 죽자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여 사변을 잘 처리하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서봉일기에도 광해군 사후 처리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시방은 훈구공신 집안 출신이면서도 사림 출신 정승 김육을 따르며 형 이시백과 함께 대동법을 떠받쳤다. 영의정에 추봉되었다. 이명한 -삼등현령 이계의 손자이자 좌의정 이정구의 아들이다. 광해군 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을 살폈다. 이후 옥당에서 근무하다가 호당에 들어갔다. 또한 사가독서를 했으며, 승문원제술관, 한학교수, 교리 등을 겸대하다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사간에 승진한 뒤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고,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 신익성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기도 했다. 이듬해 세자이사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서산에 일모하니 또한 이명한의 작품이며, 남구만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동창곡이 사실 이명한이 지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약천집』에 당시 유행했던 한글 시조 정몽주의 단심가, 이항복의 철령숙운가와 함께 동창곡이 나와 있는데 이명한의 시조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642년 진사시에 아들 이만상이 시험을 봤는데, 당시 부친인 이명한이 시험관으로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만상이 1등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시사를 관장하던 부친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아들 이만상을 2등에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들 이만상은 부친의 병에 마음을 졸이며 간호를 하다 몸이 상하여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일상 -이명한의 큰아들. 17세 소년 등과한 천재. 문과급제를 하고도 너무 어려 임관을 못하고 몇 년간 책만 봤다. 병자호란 당시까지도 아직 새파랬는데 청나라에 대해 주전론만 주장하다가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귀양갔다. 이후로도 파직됐다가 복직됐다가 관직 생활이 평탄치 못했지만 결국 비변사당상과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 동촌 이씨 8상 중 첫째다. 이관징 -숙종 대 남인. 숙종의 신임을 받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두루 관직을 거쳤으며 청렴한 관리로 이름났다. 그러나 갑술환국 때 삭출되었다가 이듬해 직첩이 환급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영의정 권대운이 기사환국으로 자신이 다시 집권하자 정치적 동료인 좌의정 목내선, 공조판서 오정위, 좌참찬 이관징과 대신들의 아들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권대운 기로연회도>이다. 이 작품은 집단 초상화의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또한 이 연회에 참석한 이관징의 아들 이옥은 이 모임을 기념하여 「사로연회병서(四老宴會屛序)」라는 글을 남겼다. 이단상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로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 서호(西湖),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 해 병과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을 지냈으며, 의정부 사인으로 지제교를 겸했다. 이후 사가독서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서 정론(正論)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부제학 등을 지냈다. 사후 민정중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양관제학에 추증됐다가 이조판서로 다시 추증됐다. 이희조 -이단상의 큰아들이다. 부친인 이단상의 뜻을 계승하여 서인의 의리론을 수호했다. 노론과 소론의 분열 당시 노론에 선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영암에 유배되었다. 이후 철산으로 이배 도중 정주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이조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됐다. 이석관 -자는 대유, 호는 삼금당. 전라도 영암 출신으로, 관찰사와 이조참의 등을 지낸 이숙함의 후손이며,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 연양군에 추봉된 청백리 청련 이후백의 현손이다. 숙종 12년에 무과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연리 인물 중 유일하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이하조 -자는 낙보, 호는 삼수헌. 이단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이행원의 딸이다. 부인은 김창국의 여식인 안동 김씨이다. 16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서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삼수헌을 지어놓고 10여년 동안 자연 속에 묻혀 지내다가 음보로 기용되어, 1694년에 세자익위사세마가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주부·공조좌랑을 지내고, 1698년에 부평현감으로 나가 치적이 높았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여담으로 김창국의 다른 딸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이다. 이정보 -대제학 이일상의 증손으로 경종 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영조 8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좌랑, 정언 등을 지내다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를 상소했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했다. 1737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교리가 되고 이조좌랑, 교서관교리, 이조정랑, 응교, 형조참의,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엔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을 쌓고 목장을 설치해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으며, 1742년엔 승지로 전임하여 부제학, 대사성, 대사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등을 지냈으며, 1750년에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 뒤 동지경연사, 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이 되고, 1754년에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에 우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고, 1756년에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엔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 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엔 이조판서로 수어사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 대제학, 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에 승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상소를 하다 여러 번 파직되었다. 이후 -노론의 영수로 영의정 이시백의 5대손이며, 좌의정을 지냈다. 이후에게는 과거 시험과 관련된 야사가 존재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후는 늙도록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고 음서로 조선의 지방관 중 3대 요직인 나주목사를 지내고 있을 때 형 이유가 자신의 생일잔치에 참석해달라고 하여 잔치에 갔다. 이때 이유가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는데, 동석했던 호조판서가 "언제 일일이 점을 보겠느냐? 제일 먼저 정승이 될 것 같은 인물을 고르라."라고 하자 점쟁이는 당시 과거를 모두 낙방해 음서로나마 나주목사를 지내고 있던 이후를 지목했다. 이에 이후는 "내가 과거에 붙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정승이 되냐"며 화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그날 밤 이유가 "이것도 인연인데 과거를 보라"고 권했고, 이에 이후가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합격했다. 이 일로 한양에선 낙방 도사가 과거에 합격했다며 떠들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는 정말로 9년 만에 정승이 되었다.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을 비롯하여 유언비어가 심한 데 대한 왕의 추궁을 받자, 그에 책임을 느낀 나머지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과 음독자살하였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이천보 -영조 대 영의정, 노론의 영수이다. 증조부는 비변사 당상을 지낸 이일상이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외손자로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또 판서 이문원의 양아버지이자 좌의정 이존수의 조부이다. 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같은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76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인책하여 음독 자결하였다. 가마나 말이 아니라 검은 소를 타고 다녀 까막소 대감이란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사위는 풍양인 우의정 조경이다. 이지억 -자는 덕수(德廋)·항승(恒承)·대수(大廋), 호는 성헌(醒軒)이다. 이조판서 이광정의 후손이며, 이성징의 증손으로 생부는 이만선이고, 양부는 정랑 이만성이다. 이지억의 육촌인 이지서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참수당한 이지시의 재종이라는 이유와 그의 일파인 이지경(李之璟)과 이만춘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과거를 보지 못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데에 불만을 품고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혐의에 대해 추국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육촌인 이지억을 포함해 이지억의 형제 이지양과 이지목을 자신의 일파라고 지목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이지억이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조 27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장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4년 강릉부사·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간 지 10년이 못 되어 정경(正卿)의 자리에 올랐는데, 관작은 모두 영조의 특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승진이 관작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처사라 하여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공조·형조·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동안 파직과 등용이 반복되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몹시 애석히 여기고, 그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입후(立後)하게 하였으며, 상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이다. 이민보 -노론의 인물로 자는 백눌(伯訥), 호는 상와(常窩)·풍서(豐墅),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보로 군수가 되고 장악원정, 동부승지,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그 후 정조 15년에 공조판서가 되어 장악원제조를 겸했으며, 그후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796년 노인직(老人職)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돈령부판사가 되었는데, 음보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영의정 황희의 아들 황수신 이후 처음이었다. 판서 이조원(李肇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명식 -시파의 원년 멤버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비변사당상·의정부좌참찬·개성부유수·병조판서·의정부우참찬·예조판서·가례도감의 제조·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788년에 평안도관찰사 재직 당시 환곡과 그 발매의 폐단을 아뢰었다. 육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으며, 정조 21년엔 봉조하가 되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써 정조가 신하 124명에게 주자의 시 1224수를 필사하게 할 때 아들과 함께 발탁되어 영광으로 여겼다. 그가 사망하자 정조가 애도하였으나 1801년 지평 심보영(沈普永)과 윤우렬(尹羽烈) 등의 상소에 따라 추삭되고 1805년에는 아들인 이면응(李冕膺)까지 탄핵을 받았다. 그 후 복관되어 1820년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성원 -병조판서, 경상도·평안도관찰사,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재직 중 다리는 사치일 뿐 일종의 폐단이니 다리를 금해야 한다고 했다. 1789년에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파견 되었다가 돌아와서 죽었다. 이조원(李祖源) -이진보의 아들로 1735년에 태어나 1806년에 죽었다. 1790년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한성부좌윤으로 재직중이던 1791년 동지부사로 연경에 다녀와 대사성을 역임한 뒤 대사헌에 올랐지만 곧 체직되었고, 도승지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1796년에 예조판서로 서용되었고, 그 뒤 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공조판서로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순조 이후 노론의 시파로 활약하다가 1805년 김대비 계인 김달순과 함께 안동 김씨의 김좌근에 맞서다가 방귀전리 당했다. 정부인(貞夫人) 연안 이씨 -재주와 문필이 뛰어난 여류 문사. 예조판서 이지억의 차녀로 1737년에 출생하였다. 류성룡의 8세손인 류사춘과 결혼하여 안동에서 유복하게 살면서 3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은 초계문신(抄啓文臣) 류태좌이다. 연안 이씨는 『쌍벽가』와 『부여노정기』 등 규방가사를 지었다. 『쌍벽가』는 정조 18년에 안동 하회에서 지은 것으로 맏아들 태좌와 큰조카 상조가 동년 동학으로 함께 과거에 급제하니 정조가 장질을 인견(引見)하고 이 훌륭한 일과 아울러 류성룡의 음덕(陰德)을 기려 제문을 지어 승지 이익운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자, 그날 즉석에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326구이다. 또한 제목에 쓰인 ‘쌍벽’은 과거 급제한 두 형제의 준수하고 출중함이 서로 백중함을 칭찬한 것이다. 이 가사는 구성의 일관성, 뛰어난 조사(措辭), 유려한 문장 등에 있어, 규방가사 중 수작으로 꼽힌다. 또한, 대부분의 규방가사가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데 비하여, 『쌍벽가』는 작자와 연대가 잘 알려진 작품이며 연대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부여노정기』는 내용은 하회에서 부여 관아까지 도임하는 행차에 내행(內行)으로 끼어 여행하는 동안의 기록을 기행문으로 읊은 동시에, 부여 관아의 생활과 도임잔치, 남편의 수연(壽宴) 잔치를 읊으면서 성은에 감축하고 있다. 여행하는 동안을 읊은 내용은, 예천의 오천내, 삼산에서 옛 벗을 만남, 함창의 정결한 음식, 상주의 인물, 보은의 속리산, 노성의 은진미륵, 오리정의 넓은 들과 풍경 등이다. 이 역시 작자와 연대가 확실한 규방가사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 중의 하나이며, 수작에 속한다. 이기연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연평부원군 이광정의 6세손으로 이지계의 사남이다. 충주에 있는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이기연은 동생인 이최연과 함께 아버지의 기일 때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함경도 종성 근처로 유배를 갔으나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유배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포교 활동을 계속한 탓에 1801년에 참형되었다. 참고로 이기연은 동생 이최연과 함께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삭제되어 현재 연안 이씨 족보에서 이지계의 아들은 3명으로 나온다. 이문원 -본래 영의정 이천보의 먼 친척인 이국보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는 이천보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서(蔭敍)로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관직이 호조좌랑에 이른 후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와 승정원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여주목사, 선혜청 제조, 공조·이조·형조·병조·예조의 판서, 함경도관찰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병판을 지낼 때 인척인 오재순이 이판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을 겸할 수 없다먀 사직했다. 1788년엔 이조판서로 재직 중 홍봉한과 가까운 한덕후를 사헌부에 천거한 일로 비난을 받자 빈청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물러나 숙천에 3개월간 유배되는 등 소소한 처벌들을 겪기도 하였다. 1790년에 이조원(李祖源)이 경상도관찰사를 지내자 이문원이 자신은 황해도감사, 이시수가 함경감사로 재직 중이므로 연안 이씨 일문이 삼번(三潘)을 맡을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792년에는 채제공을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향리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외에도 지경연사,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문원은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관련한 장난 괴수 이문원이라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으니 재미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정운 -이조판서에 증직된 이징대의 아들이다. 1769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정언·지평 등을 거쳐 1781년에 홍충도암행어사가 되고, 1784년 서장관으로서 사은사(謝恩使) 박명원(朴明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 등을 지내다가 한때 안치되었고, 1796년 충청도관찰사, 이듬해 함경도관찰사, 1800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문명이 뛰어났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여담으로 아들 이조판서 이명적이 동래부사로 재직 당시 동래부에 관여하던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이명적 축제혜민비(李明迪築堤惠民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익운 -형조판서 이정운의 동생이다. 1774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801년, 경기도관찰사 때 주문모(周文謨)와 관련된 천주교신자 18인을 잡아 심문한 뒤 그 중 3인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후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이조원(李肇源) -이민보의 아들로 1758년에 태어나 1832년에 죽었다. 앞에 서술되어 있는 동시대에 같은 집안 사람인 동명이인이 존재하므로 구분을 잘 해야한다.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로 청에 파견되었다. 이 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1827년 승지 이해청과 사간원과 사헌부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했을 때 김기서·김기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탄핵하자, 봉조하로서 무고라고 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참시당하였다. 풍양 조씨계의 인물로 안동 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후에 헌종 1년에 대왕대비의 명으로 신원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곤수 -자는 성서, 호는 수재. 판서 이길보의 손자로 좌의정 이성원의 아들이다. 21세 때인 1782년 성균관 유생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이후 시강원설서가 되었고, 1787년에는 황해도·평안도 양도의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성원을 따라가다가 병으로 요절하였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정조에게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가 직접 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이에 이곤수가 요절하자 정조는 몹시 애통해 하였다.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으며, 정조의 말을 기록한 『일득성어록(日得聖語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수재유고』 8권 3책이 있다. 이존수 -영의정 이천보의 손자로 1819년 대사헌·이조판서, 이듬해 공조판서, 1821년 예조판서·호조판서, 1823년 예문관제학·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6년 함경감사 때에 조적의 고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오조변통책(五條變通策)을 강구하였다. 이듬해엔 우의정이 되어 수령 고과의 법을 엄하게 하고 족징(族徵)의 폐단을 근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1829년에 좌의정이 되어 포삼을 잠월하는 폐단을 막고, 망화정(望華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관속을 빙자해 도매하므로 이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좌의정 재직 중에 죽었는데 명문가 출신으로 유배 하나 없이 벼슬길이 순탄했으며, 왕에게 직언하며 아첨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했다. 또한 이인화의 소설인 《영원한 제국》의 주인공 이인몽의 실제 모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이명호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본래 이정운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이익운에게 입양되었다. 이명호의 이름은 정조가 지어준 것으로 정조는 뒤에 이명호의 자(字)도 친히 지어주기도 했다. 이를 보아 정조가 이명호를 많이 아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명호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오로지 천주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방식으로만 생활했는데 언행을 온순히 하고, 식사를 극도로 검소히 했으며, 기도와 성서 그리고 주일의 교우 활동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보았던 이익운은 이런 아들을 크게 꾸짖고 온갖 말로 배교할 것을 위협했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고,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끝까지 설득을 거부당한 이익운은 결국 이명호에게 스스로 죽으라고 사약을 드밀었고, 이명호가 이를 거부하자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고는 강제로 먹였다.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이명호가 25세의 나이로 절명한 뒤로 그 옆에는 약사발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217] 그러나 이명호는 자주 이명불이란 이름과 뒤섞이는데 이명불은 족보에 이익운의 형 이정운의 장자로 나온다. 이를 보아 이명호의 이칭일 수도 있으나, 장남의 장자를 3남에게 입양을 보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족보를 보면 이익운에게 양자로 들어온 아들은 이명불이 아닌 이명호가 맞다. 그럼에도 「송담유록」[218]과 「눌암기략」등은 모두 이명호가 아닌 이명불로 적고 있다. 게다가 족보에선 이명불의 후대가 끊겼고, 일체의 기록이 말소된 점도 의문이다. 천주교 측의 기록에는 이명호 요한으로 나오고, 1801년 10월 26일 순조실록 기사에도 이명호로 나와 두 사람이 혼동된 이유를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이약우 -좌의정 이성원의 손자로 순조 10년에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1835년에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 병조, 형조, 공조, 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찬집당상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에 봉해지고 공조, 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이 되고, 예조, 공조, 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약우는 순조, 헌종, 철종의 권우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또한 문장에 뛰어나 헌종의 시장을 쓰고,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러 경외감을 느끼게 하였다. 외에도 역학과 산수에도 정통했다. 이가우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한성판윤을 10회나 지내면서 조선 최다 한성판윤 역임자가 되었다. 이에 이가우를 ‘판윤대감’이라 불렸지만 그의 재임기간을 통산하면 1년 3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이후 철종 대에 판의금부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순익 -초명은 이구익(李九翼), 자는 유서(唯怜)·유서(攸怜), 시호는 문정(文靖). 이약우의 아들로 철종 8년에 서울에서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한 뒤 그 이듬해 규장각 직각이 되었다. 고종 2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를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875년에는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대사헌·공조판서를 거쳐 1890년 2월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 뒤 다시 공조판서,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를 지냈다. 1891년 4월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892년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1894년에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897년 봉상시 제조를 거쳐 의정부 찬성에 임명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중추원 일등 의관이 되고 흥선대원군의 상례에 지문제술관(誌文製述官)으로 차출되었다. 1899년 장례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1901년부터는 규장각 학사, 홍문관 학사,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902년에 정1품 보국(輔國)에 올랐으며, 1904년과 그 이듬해에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日講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1906년에 홍문관 학사를 지냈으며, 칙임관 1등에 올랐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조연 -자는 경집, 호는 완서, 시호는 충정이다. 서얼 출신이자 온건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1880년에 사헌부감찰로서 개항 후 처음으로 파견되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수신사 조병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문과를 병과로 급제하고, 이해 고선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톈진에 간 유학생과 공장들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임오군란 때에 흥선대원군이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에 의하여 청나라에 끌려가자 통리기무아문주사로 조영하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 수금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의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좌감독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 기계국총판, 혜상공국총판, 이조참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1884년에는 협판군국사무 겸 기계국총판을 지냈다. 그는 온건개화파였지만 친청정치행적으로 개화당으로부터 수구당이라고 지목을 받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사건이 벌어지자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했던 이조연이 국가대사가 벌어짐을 눈치채고 궐내로 들어가려던 중 민태호, 한규직, 윤태준 등과 같이 개화당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여담으로 윤태준과 중국 상하이에 갔을 때 밤에 길거리에 나간 이조연은 길가에 떨어진 주머니를 발견하여 가져와서 그 안을 열어보니 100만냥의 가치로 되어 보이는 지폐 수천 원이 들어있었다. 이에 이조연이 자고 있던 윤태준을 깨워 이것을 가져가면 조선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윤태준의 생각은 어떻냐고 물어보자 윤태준이 이조연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 이에 이조연은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날이 밝자 대문 위에 전날에 수천 원의 지폐를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붙였고, 이에 돈의 주인인 영국인이 찾아와 "내가 듣기로는 동양에는 인물이 적다고 들었는데, 공처럼 훌륭한 분도 계십니까?"라며 돈을 찾아준 이조연에게 감사를 표한 후 사례금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이 신문에 기재되어 온 천하에 알리게 되자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이조연의 아들 이탁을 배천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도재 -1848년 생으로 호는 심재, 운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1882년 증광문과 급제생으로 이완용, 서재필 등과 동기다. 이듬해인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219] 문무를 겸전해 갑신정변 때 진압군으로 참여한 그는 동학농민운동 때 전라감사로 나가 전봉준을 체포했다.[220] 대한제국의 부장(副將)으로서 군부대신에 임명된 후 학부대신, 외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철도원총재, 법부대신, 고등재판소재판장,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귀족원경, 장례원경·시종원경, 대한제국 중추원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6년 8월에 그 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太極章)을 서훈받았으며, 1907년엔 수학원장이었던 이도재가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후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후에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강제로 고종을 폐위하려 하자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 등과 나문정죄 당했고, 다시 시종원경과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으나, 조중응이 고종의 양위식에 질병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아뢰어 탄핵을 받았다. 1909년에 타계하자 순종이 몹시 애통해하며 궁내부로 하여금 장례 용품을 넉넉하게 지원하도록 했다. |
일제 강점기 이현섭 -1844년 생. 우국지사로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곡기를 끊고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이학재 -1888년에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퇴직 후인 1908년에 대동회를 조직하여 발기인, 부회장, 상무국장, 임시회장 등을 맡았으며, 그해 말에는 현 논산시 지역인 충청남도 은진과 강경에 노동회를 설립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되자 이토 히로부미의 송덕비 건립을 목표로 하는 이등공송덕비건의소를 건립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예산을 할당하고 이윤용을 찾아가 협의했으며, 경시청에 찾아가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일제에 머무르면서 한일 합병 운동을 벌이던 송병준이 일제의 일은 자신이 맡아서 할 터이니 한국에서는 일진회가 이학재와 의논해 한일 합병을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 합병 찬성파들의 신임을 받았다. 이러한 친일 행동으로 그는 1934년 일본 우익단체인 흑룡회가 세운 일한합방기념탑의 석실 안에 일한합방공로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평안남도에서 의병이 이학재의 무리라 하여 평남 상무 두령 권중혁을 구타하고 군자금을 빼앗는 일이 벌어졌을 만큼 원성도 높았다. 여담으로 연리 문중에선 이학재를 족보에서 삭제하는 일을 논의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설 -1850년 생 독립운동가로 충남 홍성 사람. 병인양요, 강화도조약 당시 젊은 우국지사였던 그는 끊임없이 외세 격퇴를 주장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낙향했다. 특히 일제가 벌인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6년 병환으로 사망.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경균 -1850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 파리 강화 회의에 파리 장서를 보낼 때 서명했다. 김천 대표로 독립 청원서를 보냈다. 201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명균의 육촌이다. 이석균 -1855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 이명균의 사촌으로 옆집에 살았다. 이경균과는 육촌이다. 1881년 영남 유생들이 정부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척사 운동을 벌일 때 공사원으로 참여했다. 1919년 만세 운동 때 파리 강화 회의 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1919년 4월 체포돼 고문을 받고 노구에 후유증을 얻는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1927년 사망한다.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이명균 -1863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으로 성종 때 공신 이숭원의 14세손이다. 호는 일괴. 1919년 3.1 운동 때 경북 만세 운동을 조직하다 옥고를 치른다.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보낼 때 같이 서명하고 유림단 대표로 활동하다 집행 유예 처분을 받는다. 1920년 문경에서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을 결성하고 군자금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 자비를 털어 무려 10만 원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이 된다. 1923년 군자금 모금을 하다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탈골, 자상, 화상 때문에 5월 2일 순국한다.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이도익 -1865년 생으로 1894년 법부아문의 주사가 된 뒤 관리로 근무했다. 대한제국의 법부 주사와 한성재판소 검사를 거쳤고, 농상공부, 궁내부, 시종원 등지에서 일했다. 1907년 탁지부 서기관에 올랐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자문 기관인 중추원이 설치되자 부찬의에 임명되었고, 부찬의로 11년간 재직하다가 1921년 중추원 편제 개편 후 참의가 되었다. 1912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은 바도 있다. 1916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반도사 편찬사업을 시작했을 때 조사주임을 맡아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켜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인 학자들의 집필 작업에 앞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도익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동녕 -1869년 생. 초대 임시정부 주석, 제3·5·9·10·13·1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제1대·12대·15대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천안 사람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간도, 연해주, 만주를 누비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승만이 개판치고 떠난 임시정부를 맡아 뒷수습을 해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진영을 정치력으로 단결시켰다. 1940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국 쓰촨에서 타계했다. 또한 김구 선생의 멘토이자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동녕 선생의 유언으로 임시정부 3당이 1개의 당으로 합당되었다. 한국 국회의 뿌리인 임시의정원장으로서 현재 여의도 국회 로비에 그의 흉상이 있고, 천안엔 그의 동상이 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으나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올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이병렬 -1870년 생으로 본적은 충북 음성이다. 1902년에 판임관 6등의 농상공부 주사가 되면서 관계(官界)에 입문하였다. 농상공부에서 박람회 업무를 담당하여 1903년에는 일본 오사카시에 파견을 다녀오기도 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를 도왔고, 육군유년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에는 평안남도 사무관으로 발령받았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황해도 안악군 군수에 임명되었고, 서흥군과 봉산군 군수를 거쳐 경기도 여주군 군수를 역임하였다. 1922년 말에 경기도 여주군수를 마지막으로 퇴관하였다. 퇴관 후 국민협회 전무와 부회장, 회장, 고문 등을 맡아 공개적으로 친일을 표방한 신일본주의 운동을 오랜 기간 주도하였고, 1927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지역에 거주하며, 이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노년에는 충북 음성군으로 내려가 감곡면 면장으로 재직하며 보냈다. 황해도 서흥군수로 재직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음성군 감곡면장이던 1938년을 기준으로 종5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과 친일단체 부문,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의 중추원과 관료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주승 -1870년 생으로 선공감 감역관을 지냈으며, 1895년 제천 을미의병 때 가문의 재력과 중앙 및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연고를 동원하여 여러모로 의병을 도왔다. 제천 의진이 충주성을 공략할 때 충주향교의 도유사 이벽원과 지방대 두령 김성한 등을 시켜 의병에 내응하게 하였고, 족속인 이면재 등과 함께 청풍 쪽으로 우회하던 신지수의 별동 부대를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살던 제천의 한수면 북노리는 제천과 충주 사이에 있어 의병들의 행군로에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후 적의 공격이 심화되자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서울에 파견되어 조정의 고관과 접촉하면서 왕의 영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을미의병이 실패한 후에도 살미면 골운의 토지를 팔아 유인석의 재기를 지원하였으며, 1907년 정미의병 때에도 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수안보 석문리 부근의 토지를 팔아 적극 후원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의병에 관련한 귀중한 문서를 모아서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1946년에 타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노촌 이구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조승 -1873년 생으로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이다. 유인석의 재당숙인 유중교의 문인으로 유중교와 유치원의 가르침을 받았다. 유중교가 세상을 뜬 후에는 유인석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장담마을에서 추진하였던 『성재집(省齋集)』을 발간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단발령이 내리자 스승과 함께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안승우 등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자 홍선표·이기진·정화용·이정규 등과 함께 대장 종사가 되어 종군하여 작전 계획과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이 근거지로 삼았던 제천에서 관군에게 패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의병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돌리기 위하여 애쓰다가 서북 지방을 향해 이동하는 대장진을 뒤따랐다. 유인석이 청나라로 망명하자 홍선표 등과 함께 스승을 좇았으며, 청나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선양까지 다녀왔는데, 병으로 귀국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유인석의 뒤를 좇아 중국을 다녀온 기록인 『서행일기(西行日記)』가 전하는데, 호좌의진이 장기렴의 관군에게 패한 후 의병들의 동향을 엿보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여담으로 1894년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충주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이 잘 기록되어 있어 충주와 그 일대 동학농민군의 활동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갑오일기』의 저자 의병장 이면재는 그의 족속이다. 이민영 -1877년 생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관계(官界)에 들어섰다.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 관리로 근무하였다. 1906년 12월에는 충청남도 홍산세무서에 회계 감독을 위해 파견되었으며, 계속해서 회계와 세무 분야에서 일했다. 1907년을 기준으로 품계는 9품이었으며, 1908년에는 탁지부 재무서 소속의 전주재무감독국 산하의 석성재무서에서 근무 중이었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 관리로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충청남도 석성군에서 그대로 서기로 일하다가, 곧 서천군으로 이동 발령받았다. 이후 충청남도 내무부와 제1부에서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1918년 11월에 연기군 군수로 승진하였다. 연기군에 이어 예산군, 홍성군, 서산군, 아산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아산군수이던 1930년을 기준으로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가 쇼와 천황 즉위 기념으로 수여한 쇼와 대례기념장도 받은 바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승녕 -1879년 생으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군인이다.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로 뽑혀 1903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보병 참위로 임관하였고, 시위대와 친위대에 배치받아 장교로 복무했다. 1905년에 시위대 제1연대 제2대대에 발령받았고, 1907년에는 정3품으로 승급하고 육군 보병 부위가 되었다. 그러나 1907년 8월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건이 일어나 이승녕은 모교인 육군무관학교에 발령받았다. 이후 일본군 육군으로 소속을 옮겨 조선군 사령부에서 복무하며 육군 소좌에까지 올랐다. 일본군 보병 중위이던 1920년에 훈6등 서보장을 받고 종7위에 서위된 바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고, 최종 계급은 대한제국 육군 부위와 일본군 소좌이다. 이장녕 -1881년 생으로 독립군이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출신이다.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독립군 참모총장에 올랐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연해주에서 중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932년에 일본이 사주한 중국 마적떼에게 당해 일가족이 몰살당하고[221], 자신도 살해당했다. 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정 -1884년 생으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여산면에서 익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횃불 시위를 박사국과 이병석 등과 함께 주도하여 일으켰다. 이정은 시위 대열을 이끌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정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여산면 여산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에 이정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이철영 -1884년 생으로 독립운동가이다. 월사 이정구의 후손으로 1910년 8월 서산 읍내에 있는 경찰서 게시판에 한일합방에 대한 방문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포고문을 찢어 버렸으며 게시판을 부숴 불을 지르고 서산경찰서에 뛰어들어 한일합방의 부당함과 ‘척왜(斥倭)’를 외쳤다. 이에 이철영은 그 자리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고문을 당했다. 이후 공주 감옥으로 이감 도중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호송을 담당한 일본 경찰 두 명을 죽이고 몸을 피했다. 떠돌던 이철영은 서산 가야산으로 들어와 약초를 캐면서 살다가 우연히 동생 이우영(李又榮)의 처남 최숙현(崔淑鉉)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이름을 이의영(李宜榮)으로 바꾸었다. 그 후 인근 당진에 있던 노공재(盧公在)의 집에 머물면서 한학을 가르쳤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43년 30여 년 만에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넷째 동생인 이학영(李學榮)의 집에서 지내다가 1945년 2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5년 2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서산 유림과 제자들의 주도 아래 군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60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서산시청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철영이 후학을 양성했던 당진시 송악읍에는 이철영의 추모기(追慕記)가 있다. 이원순 -1890년 생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서울 출생이다. 보성전문을 나와 192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승만을 도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대조선독립단의 회장으로 3.1운동의 진상을 미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그러나 헛짓거리를 거듭하는 이승만과 결별해 광복 직후 귀국도 못했고 정부 여권도 없었지만, 스톡홀름으로 날아가 대한민국의 IOC 가입을 도왔다. 야당 정치인 신익희와 친했으며 후일 김구 기념사업회에 후원하기도 했다. 54년 한국증권주식회사, 1958년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등을 차려 사업가로서 길을 걸었다. 197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88년 이미 99세였던 그는 서울올림픽에 남다른 감회를 인터뷰한 적도 있다. 1993년 10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병기 -1891년 생으로 국어학자. 1921년 12월 휘문 의숙에서 김윤경, 최현배, 최두선 등 16명의 유지와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가 되었다. 1942년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로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휘문고에서 교편을 잡고 연희전문 강사를 거쳐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됐다. 국문학 시조 연구에 매진하다 68년 타계했다. 또한 그의 시조를 노래로 가곡한 파랑새와 별 등이 있다. 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이병석 -가람 이병기 선생의 동생으로 1894년에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이병석은 이정·박사국 등과 함께 주도하여 횃불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는 익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 중 하나였다. 약 200여 명의 면민들은 두루마기를 잘라 ‘조선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익산 여산면 헌병분견소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병석은 시위 대열을 이끌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4월 1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병석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여산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에 이병석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이효덕 -1895년 생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감리회 전도사.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부유한 양반 집안이어서, 그녀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녀가 5살 때 가족이 개신교로 개종하여 30리 떨어진 예배당에 들어갔다. 그녀의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문에 관심이 깊었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상당했다. 특히 막내딸인 그녀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는데 모친은 이효덕의 신앙교육을 위해 7살된 딸을 교회 목사에게 맡겼고, 8살 때는 진남포로 유학보내 공부시켰다. 이후 이효덕은 광혜병원의 어느 전도사 집에 유숙하면서 정진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 학교에 다니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전도부인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이를 끝까지 지켰다. 이효덕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조선 여성과 무산 아동교육, 물산장려운동을 벌였으며, 명주를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니도록 하는 ‘채색 옷 입기’, 음식에 파리 꾀이지 않게 하는 법, 주택의 청결 등 여러 사회 운동도 전개하였다. 또한 광복 후 1968년에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적을 회고했다. 그녀는 당시 서울 종로 5가 245번지 창동상회 내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지만, "그런대로 후회 없이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그동안의 생애를 만족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1978년에 서울 감리교 안식관에서 소천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이순탁 -1897년 생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효정(曉亭)이며 전남 해남 출생이다. 1922년에 일본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3년엔 연희전문학교 상학과 과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연희전문학교 봉직 만 10년에 안식일 휴가(1년)로 세계 각국을 시찰하였다. 이후 1933년의 이른바 연전상과사건으로 3년의 옥고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엔 한국민주당에 입당했지만 1946년 좌우합작에 찬성하면서 탈당했다. 이후 민중동맹, 조선공화당, 민주주의독립전선, 민주독립당 등 중도좌파 성향 정당에서 활동했다. 1946년 10월 미군정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된 그는 토지개혁법 제정을 적극 추진했는데, 유상 매수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이 바로 이순탁이 주장한 토지개혁이었다. 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상경대학장, 1948년 초대 내각에서 대한민국정부기획처 초대 처장을 지내고, 1948년 9월 발족한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에서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논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조직에 관한 일고찰」, 「노동운동과 소작운동」, 「조선인의 결혼연령 추이」 등이 있다. 이의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 이동녕의 차남으로 1900년에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야마가타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제1회로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성부에 이의식 내과병원을 개업하여 내과의사로 이름을 날렸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선출됐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으로 선임되어 활동했으나 6.25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이창근 -1900년 생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이다. 1923년 12월 조선인 최초로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있다가 1925년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내무국 지방과 소속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충청남도 내무부 산업과장·학무과장,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장, 경기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등을 거쳐 1942년 고등관 2등으로 승급하여 충청북도지사를 지냈으며, 1943년에 고등관 1등으로 승급하여 경상북도지사에 부임했다. 해방 전인 1945년 6월 지사직을 물러났다. 광복 후에는 화신 무역주식회사 전무, 상호 무역주식회사 전무, 경찰 후원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하여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어 기소유예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6.25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과,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었다. 이갑녕 -1904년 생으로 본적은 충북 음성이다. 중일 전쟁 당시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내선일체 정책을 적극 선전한 친일파로 1930년에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했고, 중국 상하이로 이주했다. 1934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외무성에서 촉탁으로 일했고, 1935년 3월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상해거류조선인회 회장을 지냈다. 1937년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경찰 촉탁으로 일했다. 이때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당원 3명에게 공격받기도 했다. 상해사변 때도 상해계림회 수석급 이사로서 조선인 의용대를 결성시켜 진지 구축, 군수품 하역작업, 통역·간호·취사 등으로 일본군을 도우게 했다. 그 후 1940년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 시정 30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이후 상해계림회 이사 등을 지내다 1943년엔 상해계림회 평의원과 일본 대동아성 촉탁, 상하이 주재 일본대사관 촉탁으로 일했다. 광복 이후인 1945년에 일본으로 도피했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수배를 받기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수흥 -1905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조선의 학자로 이황(李滉), 이재(李縡)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칠부화(四七附話)》를 저술한 외암 이식[222]의 직계 후손이며 유생 이일영의 외아들이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훈련을 받았다. 만주로 가 대한 육군 주 만주 참의부를 조직했다. 또한 1926년 순종 기일에 맞춰 기획된 6.10 만세운동 때 동소문 파출소를 습격하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이천에서 식산 회사 주재소 등을 파괴하는 등 작전을 펼친 후 부친 장사를 치르러 귀향했다가 친척의 신고로 일제에 검거된다. 이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공소를 포기해 사형 당하기를 자청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의 1928년 7월 15일자 기사엔 이수흥이 사형을 언도받고도 태연자약해 마치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처럼 보였다며, 법정이 생긴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도 공소하지 않은 사람은 강우규, 허위, 그리고 이수흥 뿐이라고 밝혔다. 이후 1929년 2월 27일 불과 25세의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되었다. 이의복 -1906년에 이장녕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충남 천안이다. 1921년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정의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등 만주 지역에서 아버지 이장녕을 도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이숭녕 -1908년 서울에서 규장각 경연참찬관 원임비서승, 궁내부 기후관 춘사(春沙) 이병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심악.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및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굴지의 국어학자로서 음운체계의 과학적 정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근대 언어학으로써 근세 국어, 중세 문법 연구 등 국어를 연대기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원래 법대생이었으나 우리말 뿌리를 찾자는 생각으로 어문학을 전공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등 6개 언어를 할 줄 알았다.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교수를 해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정훈장교(소령)로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매일같이 실천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한 그는 대한민국 문화포장, 국민훈장 동백, 모란장에 이르기까지 국가 훈장이 4개에 달하는 슈퍼맨이었다. 팔순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쉬지 않았던 그는 1989년 뇌경색으로 지병을 얻어 1994년에 타계했다. 이항녕 -1915년 생으로 충남 아산 출신. 일제강점기 판 고위 관료 채용 시험인 고등문관시험 출신이며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다. 하동, 창녕군의 군수 등을 지냈으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는 없었으나 광복 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계속 반성하고 참회한 양심가였다. 문교부 차관,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 등을 거쳐 홍익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다. 또한 김앤장의 대표변호사인 이재후 변호사의 선친이다. |
현대 이호정 -1895년에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초대 대구고등법원장과 제13대, 14대 광주지방변호사회장을 지냈다. 이중재 -1898년 생으로 이승만 행정부에서 제5대 재무부 장관('54년)과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54년)을 지냈다. 자유당 기획위원으로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 사장도 지냈다. 재무부 장관 취임 시 재무부 관할 아래 있던 은행 감독권을 한국은행으로 환원시키고 은행법 개혁에 나섰다. 은행법 시행령, 금융기관 감독규정, 인가사항 취급규정 등을 정비시켜 아직 걸음마 단계이던 대한민국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 재무부가 가지던 은행 귀속주를 시중에 불하하는 데 잡음 없이 처리하고 뒤로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후임 장관 송인상을 시켜 3.15 부정선거 자금을 마련시킨다. 5.16 직후 이중재는 자유당 부정의 연대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지만 곧 사면된다. 이원영 -1910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했고, 매일신보에서는 정경부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말기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사무국 경제 위원회 위원,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총무과장 겸 조선항공사업사 지배인,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였다. 8.15 광복 이후 한국원양어업 주식회사 대표이사, 남한제사 주식회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73년 사단법인 대한잠사회 이사장이 되었다. 이도영 -청주 출신으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 수료하였다.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충청북도 청원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홍순옥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1956년에 홍익대학교를 인수하고 홍익공예고등전문학교, 홍익국민학교, 홍익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1970년엔 성암국민학교와 성북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71년엔 수도공과대학도 인수하였다. 같은 해 홍익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고 충청일보사 사장, 청주문화방송 사장, 남한흥산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외에도 이도영은 196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3년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 대한광업협회 부회장, 19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65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70년에 대한체육회장상(체육진흥공로), 같은 해 대통령 표창(수출진흥공로), 1972년 문교부 장관상 등을 받았다. 여담으로 현재 홍익대학교 이사장은 이도영의 육촌 동생인 이면영이다. 이정림 -대한민국 1세대 재벌로 1913년에 개성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졸업한 뒤 개성상인으로서 수련을 쌓았다. 1933년에 고무신 도매상을 시작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 지방에서 대리점을 경영하였다. 후에 천일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이합상회를 개업하였다. 1949년엔 이합상회를 개풍상사라 이름을 바꾸고 정식 무역회사를 창립하여 무역에 종사했다. 1953년엔 호양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55년엔 대한탄광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듬 해에는 대한양공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국산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였다. 59년엔 국내 최초의 민간출자 은행인 서울은행을 창립하였다. 후에 65년엔 공영화학공업주식회사, 67년에 박용학 등과 함께 대한선박주식회사 설립, 1970년에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외에도 3·1 문화 재단을 설립했으며, 경제 재건 촉진 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 2대 회장을 지내고, 해운대의 날에서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석탄산업훈장 등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유화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대한유화의 현 회장은 이정림 회장의 조카이자, 이정호 명예회장의 4남인 이순규 회장이다. 이순규 회장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에 '이순규라운지'를 자신의 기부금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이연 -한국의 민영 탄광 가운데 생산 규모가 가장 컸던 동원 탄좌의 회장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과 같이 익산 출신이다. 아들은 전원산업의 회장인 이전배 회장이다. 이예춘 -한국 배우계의 악역 대부다. 아들 이덕화가 채널A 도시어부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혔다. 이구영 -제천에서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주승의 아들로 월사 이정구의 후손이다. 이구영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구영은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강의하였다. 1950년 9월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1958년 7월 부산에서 남파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접선에 실패하여 9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강점기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후 석방됐는데 2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신영복, 심지연 등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출소한 후에 이문학회를 창립,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호서의병사적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석희 -이동녕 선생 손자로 1922년 생이다. 형은 문교부 기획관리실장과 서울교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철희이다. 본인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다. 이후 대우자동차 회장과 대우그룹 부회장을 지냈다. 부회장을 역임할 당시, 그는 어렵게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등 훌륭한 인품을 지녔던 인물이다. 이봉녕 -1924년 2월 5일 완주군 초포면 송전리에서 태어났다. 이봉녕 회장의 선대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서 살았으나 증조부가 초포면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거 했다. 이봉녕 회장은 익산시에 공장을 세워 쌍방울의 전신인 쌍녕섬유공사를 만들었고 이 회사가 커져 쌍방울그룹이 되었다. 쌍방울그룹의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이광린 -호는 칠리(七里), 1924년 2월 9일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평양제2공립중학교를 거쳐 1945년 10월 연희전문학교 전문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46년에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950년 5월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198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특히 한국의 개화기 역사 연구에 힘을 쏟아 개화사 연구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서강사학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1972년부터 서강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같은 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81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년퇴임 이후엔 한서대학교 한국사 교수와 중부대학교 총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6년 4월 11일 오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조수리사연구, 한국개화사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0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과 모란장, 3·1문화상, 대한민국학술원상, 용재상 등을 받았다. 이상수 -1925년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학사, 1956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이학석사, 1959년 같은 대학 이학박사다. 레이저 분야를 한국 최초로 개척하였으며 1968년 하버드대학교 초빙 연구원,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 6대 원장, 한국 광학회 초대 회장, 한국 물리학회 회장, 원자력청 청장등을 지냈다. 이외에 태국 방콕 AIT공학대학 이사와 일본 도쿄 유엔대학 이사 및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76년 동곡 문화상, 1979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대한민국 과학상,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밖에 대통령 표창, 성곡 문화상, 인촌상 미국 광학회상 등을 받았다. 또한 한국 광학회를 통해 미국 광학회에 전달한 기금으로 '이상수 어워드'가 제정됐다. 자국의 광학과 광산업에 공헌한 사람을 선발해 한국 광학회와 미국 광학회가 공동으로 격년 시상한다. 석사 108명 박사 48명을 길러낸 그는 2010년 타계했다. 2019년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에 선정됐다. 이철승 -1926년 생으로 상공부 차관을 지냈다. 이철승의 딸 이주영은 GS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현 전경련 회장인 허창수의 부인이며,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들 허창수 회장이 설립한 장학 재단인 남촌재단의 고문으로서 자신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2008년부터 꾸준히 기부하여 2020년 기준으로 현재 총 9억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주영의 언니 이은영은 OCI그룹 창업주인 이회림 회장의 막내아들 유니드 회장 이화영과 결혼하였다. 이철배 -1926년 생으로 대웅제약 전 명예 회장이며 전문 경영인이다. 이병두 -나진산업 설립자. 손자로 이석진 전 나진산업 대표가 있다. 이재희 -한국의 군인으로 1929년 9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했다. 1950년에 생도 2기로 임관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준장 진급 후 제2군단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1보병사단장, 육군군수사령부 참모장, 육군포병학교장,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한 후 1983년 예편하였다. 이의영 -1930년 생으로 김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총학생회장, 아시아 반공 연맹 청년학생대회 한국대표를 지냈다. 이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웅희 -문화공보부 장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80년에 대통령 공보수석에 임명돼 MBC 사장,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등을 역임하고 제13대, 14, 15대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 재경위원장까지 지냈다. 슬하에 제14대 주러시아대사관대사 이석배 대사가 있다. 이규상 -1936년 생. 동래구청장을 관선 1회, 민선 2회 역임했다. 이돈희 -1937년 생. 제42대 교육부 장관으로 서울대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교수와 한국교육학회장,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이이화 -1937년 생. 대구 출신의 재야 사학자로 민중사관적 입장을 지녔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전문가로 서원대학교 석좌교수이며 경술국치 100년 공동행동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이다. 2020년에 타계했으며,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이치호 -1939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였다. 판사 출신 정치인으로 민정당 출신의 정치인으로 3선 국회의원이었으며, 법사위 위원장도 지냈다. 이원배 -1939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유년기 때 전남 함평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 후 배재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왔으며 제1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에 임용되었다. 1973년 4월 1일에 서울고등법원 판사에 임명되었고, 1982년 9월 1일에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었다. 이어 대구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부지원장으로 옮겨 재직하던 1991년에 광주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인천지방법원과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했다.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의견을 잘 받아들인다는 평가를 받은 이원배는 서울민사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할 때인 부산고등법원장이 되었다. 그는 현직에 있는 최고참 법원장으로서 법원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의익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여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학년 때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했던 당시 경상북도청에서 근무했던 큰형 이의석을 따라 경북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공무원 출신 정치인으로 기재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5대 국회의원과 대구직할시장을 지냈다. 이일규 -특 1급 호텔인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어 서울 가든호텔의 대표자이다. 서울 가든호텔읃 1979년에 개관하여 관광호텔업, 부동산 임대업, 소매업, 외식사업, 유희시설사업 및 부대사업 등을 하며 지하 2층 지상 15층 규모에 372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또한 레스토랑, 20평에서 194평에 이르는 연회장, 동시통역 시설을 갖춘 회의장, 비즈니스 센터, 웨딩홀, 피트니스센터 등이 있다. 또한 서울 가든호텔은 베스트웨스트 브랜드 중 처음으로 특 1급 호텔로 승격된 호텔이기도 하다. 가족으로는 서울 가든호텔의 전 회장인 이정구 회장이 아버지이고, 슬하에 아들 이교상 사장이 있다. 이재후 -전 홍익대학교 총장 이항녕 교수의 아들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대전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가 김앤장에 합류하여 시니어 파트너가 되었다. 네임 파트너인 김영무, 장수길과 공동 경영을 하고 있다. 이건영 -전 건설부 차관으로 용인 출신이다.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6.25 전쟁 때 부산에서 잠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문민정부 시절 건설부 차관 직책을 잠시 지낸 그는 국토개발연구원장으로 국토 및 도시개발정책을 선도하고, 교통개발연구원장, 건설산업연구원장을 역임하며 계속 교통, 건설산업정책 연구에 참여하여 왔다. 그리고 아주대학교, 단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중부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2007년 중부대학교 충장을 끝으로 은퇴한 후 다시 문학활동을 재개하여 '계간문예'에 장편소설 <낙동강 개개비>를 연재하고 장편소설 <마지막 인사>, <엄마의 목각인형>을 발표하였다. 이구택 -1946년 생으로 김포 출신.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여 포스코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후 포스코 대표이사 회장,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장, 한국발명진흥회 회장, 국제철강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 회장은 브라질 정부의 히우브랑코 훈장을 받기도 했다. 여담으로 히우브랑코 훈장을 받은 국내인사는 이 회장을 포함하여 총 4명이다. 이회택 -1946년 생으로 김포 출신. 별명은 ‘아시아의 표범’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축구 선수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이성희 -1949년 생. 제24대 농협중앙회 중앙회장이며 최초의 수도권 단위조합 출신인 회장이다. 이덕화 -배우. 도시어부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혔다. 그러나 위키백과에선 출처도 없이 이덕화를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로 소개하였다. 이민화 -경상북도 군위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전선 연구원, 카이스트 교수 겸 창조경제 연구회(KCERN) 이사장,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이었으며 1985년 의료기기 업체인 메디슨을 설립한 1세대 벤처기업인이다. 초음파 진단기 기술을 연구하여 국내 최초 초음파 진단기를 개발했으며 다른 카이스트 출신 전문가 7명과 함께 벤처기업을 설립하였다. 한국 벤처업계의 대부로 꼽히는 인물이다.그러나 2019년 8월 3일 66세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부정맥으로 많은 후배 벤처기업인들이 그를 추모했다. 이의철 -이봉녕 회장 아들. 쌍방울그룹의 2대 회장이자 쌍방울 레이더스의 구단주였는데,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연소 구단주였다. 이석배 -장관 이웅희의 아들로 197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에 입학해 1985년 졸업하고 1989년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소련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러시아어 전문관으로 외교부에 입부한다. 비고시 출신에도 불구하고 4강 외교의 한 축인 주러대사로 임명되어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이용선 -1958년에 순천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시민통합당 대표, 민주통합당 임시대표, 문재인 정부 시민사회수석 비서관을 지낸 이력이 있다. 현재는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대외협력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양천구 을 지역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이승훈 -1960년 생으로 전 복싱 IBF 주니어 페더급 세계 챔피언(1987년). 이차영 -제44대 충청북도 괴산군수로 1987년 7급 공채 시험에 합격해 괴산군 감물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이후 충청북도청으로 전입해 괴산군 부군수, 충청북도지사 비서실장, 경제통상국장 등을 지내고 2017년 명예퇴임하였다. 명예퇴직 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선 7기 괴산군은 4년 동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 5.27%를 기록하여 도내 1위를 달성했으며, 시스템반도체 기업들을 유치하여 산업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이성윤 -전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장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바뀌면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되었다. 본관은 연안이다. 이재영 -9급 공무원 출신으로 1983년 괴산군 증평읍사무소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1991년 충청북도청으로 전입, 충청북도지사 비서실장, 증평군 부군수, 충청북도청 재난안전실장을 역임했다. 2019년 명예퇴직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여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증평군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하늘 -DJ DOC의 리더. 71년생 대구 출신으로 본명은 이근배. 1994년 데뷔하였다. 동생은 2021년에 사망한 45RPM 그룹 소속의 가수로 고 이현배다. 리마리오 -SBS 출신 개그맨으로 본명은 이상훈. 잘생겼지만 느끼한 캐릭터인 리마리오(웃찾사)로 '미끌어지듯이' 등 유행어를 히트시켜 CF, 영화 드라마 출연 등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이재영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현재 국민의 힘 강동구 을 당협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민의 힘 대외협력위원장을 지냈다. 또한 자유한국당 청년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조지타운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주식회사 범구의 회장이자 김포상공회의소 제3-4대 회장이었던 이기승이며 어머니는 제13대 국회의원 도영심이다.[227] 또한 그의 누나는 동양인 최초로 CNN 수석 부사장 자리에 오른 엘레아나 리이다. 이민훈 -대전과학기술대학교의 교수이자 사회복지학자. 소부감판사공파로 대전광역시 출생이나 서울특별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광역시로 돌아와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프리한19 데스크 출연과 SL사회복지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인식개선 교육 등을 펼치고 있다. 이지영 -호는 천미로 대한민국의 일타 강사이다. EBSi 뉴탐스런 생활과 윤리 강의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힌 적이 있다. 이청아 -배우. 아버지는 배우 이승철이다. KBS1 천상의 컬렉션에서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29세손, 지파는 삼척공파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장우 -배우. 수상한 삼형제, 웃어라 동해야 등에 출연하였다. 아버지는 예비역 장성(준장)으로 1939년 생에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전주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그레이 -예명 GRAY로 활동하는 힙합 뮤지션으로 본명은 이성화. 힙합 레이블 AOMG 소속의 프로듀서 겸 R&B 가수다. 이연희 -배우. 서울에서 태어나 성남시에서 자랐다. 이수홍 -충간공 이숭원의 후손으로 서울대학교를 만 15세의 나이로 입학한 수학 천재다. 12살이라는 나이로 영재올림피아드 2연패를 달성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수학 문제를 스스로 내고 풀었다고 하며 중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5살에 도전 골든벨 우승을 하고, 16살엔 IMO 금메달을 따고 사상 최연소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대학생 수학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MIT 수학과 박사과정을 진학했다. 이하마 -팔로워 3천 명의 트위치 스트리머. LOL, 어몽어스, 마인크래프트 등 게임 컨텐츠를 주로 하고 있다.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 성골장군 호경의 후손이자 고려 태조의 증외고조부인 신천 강씨 보육의 후손 중랑장 강인의 부인이 연안 이씨로 신천 강씨 족보에는 부인 이씨가 당나라에서 온 대장군, 연안후 이무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강인의 아들 정원부사 강세의 부인은 이수산의 여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궁원록에선 강세의 부인 수안 이씨의 아버지가 이수산이 아니라 이인(李仁)으로 기록되어 있고, 부인의 외조부는 연안 이씨 이적(李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인(李仁)은 상술했듯이 이견웅을 시조로 하는 수안 이씨와 다른 계열의 수안 이씨의 시조인데, 이 점에선 이수산과 일치한다. 또한 후대에 만들어진 신천 강씨 족보엔 강세의 부인의 아버지가 이수산이라고 적혀있으므로 이인(李仁)과 이수산이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 의문점이 들 수 있으나 이수산의 처가는 인천 채씨인데, 이인(李仁)의 처가는 연안 이씨이므로 동일 인물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즉, 둘 중 어느 하나가 오기(誤記)라는 것이다. 풍산 홍씨 시조인 홍지경의 손자이자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을 지낸 홍유의 부인이 연안 이씨로 밀직부사 판도상서 이경무의 딸이다. 강릉 유씨 시조 상서도성좌복야 유승비의 어머니가 대호군 이승안의 여식인 연안 이씨이다. 또한 유승비의 아버지는 가정대부 대제학을 지내고,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령에 증직된 유연이다. 충숙왕 원년에 태어난 광산 김씨 양간공파 중 판군기감사공파의 파조 김영리의 장모가 연안 이씨이다. 김영리 처 남양군부인의 어머니이자 봉성대부 선공부령 홍승연의 처인 연안군부인은 1256년에 태어난 통헌대부 밀직부사 민부전서 이득량의 여식이다. 즉 홍승연의 처 연안군부인은 밀직부사공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연안군부인의 아들은 문하시중 남양백 홍영통이며 홍영통의 조부는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양순공 홍경, 증조부는 충선왕 배향공신으로 벽상삼한진충동덕좌리공신 경흥군 개국후에 봉해지고,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된 충정공 홍자번이다. 외에도 김영리의 아들인 광성군 김정의 처도 미확인 6개 파 중 전법판서공파 중시조 이방[229]의 여식인 숙신택주 연안 이씨다. 또한 김정의 손자인 김원우의 처도 연안 이씨이나 역시 파계 미상이다. 영해 박씨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박회의의 부인이 연안군부인 연안 이씨로 밀직부사 이득량의 딸이다. 참고로 연안군부인의 아들이 최씨 정권을 타도한 대장군 박송비다. 박송비는 이 공으로 위사공신이 되어 수사공 좌복야와 참지정사 등 요직을 지냈다. 문의 박씨의 시조 박의중의 초배가 26세에 졸한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로 이수창의 삼녀이다.[233] 박의중은 경명왕의 아들 밀성대군의 17세손이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성과 직제학 등을 지내고, 1388년에 명나라에 들어가 철영위(鐵嶺衛)의 철폐(撤廢)를 교섭하고 돌아와 창왕 때 공신이 되었다. 후에 예문관 제학 겸 대사성을 지내고, 1392년에 고려사를 수찬하고 검교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박의중과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 사이에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박연은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공민왕 때 등과하여 정사공신, 정당문학, 대제학을 지냈고, 둘째 아들 박행도 공민왕 때 우상을 역임했다.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의 손자이자 박행의 아들 박녕은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던 두문동 칠십이현 중 한 명이다.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적장자이자 신덕왕후의 친오빠인 재령 강씨의 시조 안릉부원군 안정공 강득룡의 부인이 연안군 이엄의 딸인 연안군부인이다. 여담으로 강득룡은 고려 대에 삼사우사, 삼중대광 첨의정승 등을 지냈다. 공산 안씨 시조이자 고려 말기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조선이 건국되자 참찬문하부사에 오른 정평공 안익의 부인이 문청공 이계손의 딸인 연인 이씨다. 또한 안익의 아들인 병마절도사 안습의 부인도 이계손의 손녀이자 이량의 딸인 연안 이씨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을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오른 동원군 정평공 함부림의 후배가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함부림의 족보에 의하면 연안 이씨 부인의 아버지가 연성군 이명조(李命祖) 또는 호부상서 이상준(李尙俊)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연안 이씨 파계에선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다.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의 어머니가 좌의정 이귀령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다. 정경부인 이씨의 남편이자 의정궁주의 아버지 조뢰는 돈녕부지사를 지냈고, 조부는 조선 개국공신 한산군 조인옥,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조돈이다. 참고로 태종과 의정궁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중종 때 정권을 집권한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남곤의 처가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정경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숙천부사를 지낸 이세웅인데 여기서 이세웅이 바로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증손자이다. 즉 정경부인 이씨는 현존하지 않는 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남곤과 정경부인 이씨 사이에선 아들은 없고 딸만 3명이었다. 공조정랑과 순천군수 등을 지낸 임류의 처 연안 이씨 부인은 예부상서 이해의 후손이다. 임류의 묘표에 기록되어 있기를 연안 이씨 부인은 이비의 여식이며, 판사재감사·지문주사 이을수의 손녀, 예부상서와 밀직사사를 지낸 이해의 증손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임류의 처 연안 이씨 부인은 예부상서공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표적 피난기로 꼽히는 쇄미록을 남긴 선비 오희문의 부인이 연안 이씨다. 명재상으로 꼽히는 영의정 오윤겸의 어머니이며,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또한 오희문 처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이정수인데 이정수의 장인이 바로 성종의 서자 익양군이다. 이정수는 익양군의 차녀 이계환과 결혼하여 오희문의 처 연안 이씨를 낳은 것이다. 징비록을 기록한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조모가 이형례의 딸인 연안 이씨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토사 이정암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한 충정공 김덕함의 어머니는 파계를 고증할 수 없는 연안 이씨이다. 어머니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우부장 이윤공(李胤公)으로 조부는 후릉참봉 이정생(李廷生)이며, 증조부는 홍문관직제학 이삼산(李三産)[234]이다. 여담으로 김덕함은 1636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혼인하여 영안위에 봉해진 홍주원의 어머니는 이정구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국영 등이 후손이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이자 우의정 강석기의 삼녀가 이정구의 손자이자 비변사당상 이소한의 아들인 이홍상의 부인이다. 인현왕후의 오빠 예조판서 민진후의 선처가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 인천부사 이단상의 딸이며 후처는 현감 이덕로의 딸로 같은 연안 이씨다. 특히 후처 소생 민익수가 바로 명성황후의 고조부가 된다. 여담이지만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외할아버지도 연안 이씨인 연원부원군 해고 이광정이다. 인경왕후의 숙모는 형조판서 이은상의 딸인데,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인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지은 양관 대제학 김만중의 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가 판서 이은상의 딸이기 때문이다. 또 인경왕후의 조카가 노론의 영수였던 이천보이기도 한데 이천보의 어머니 광산 김씨가 김만기의 삼녀로 이천보의 어머니는 인경왕후의 여동생이 된다. 즉 인경왕후의 숙모도 연안 이씨, 조카도 연안 이씨라는 것이다. 인현왕후의 새언니도 연안 이씨인데 숙종의 정비였던 3명 중 2명이 연리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채제공의 어머니 정경부인 이씨는 연안 이씨다. 정경부인 이씨는 18세의 나이 때 혼서와 택일단자까지 받은 상태에서 결혼하려고 하던 남편이 혼례를 치르기 직전에 급사하여 과부가 될 뻔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경부인 이씨는 당시 예조판서에게 용기 있게 사정하여 당시에 흔하지 않게 왕명[235]으로 재혼을 허락받았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한 조만영의 아들이자 이조·예조판서를 지낸 조병구의 처가 정부인 연안 이씨다. 조병구는 신 안동 김씨와 세력 다툼을 벌이는데 앞장섰으며, 삼촌인 조인영이 영의정에 오르자 합세하여 정치 세력을 키운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다.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는 연안 이씨인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하였다. 개화파의 시조인 우의정 박규수의 부인이 연안 이씨다. 박규수는 평안도관찰사를 지낼 당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자 거부하며 이현익을 시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이현익을 침임자로 오해하여 이현익을 붙잡고, 무장하여 도발하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236] 철인왕후의 모친이자 안동 김씨 세도가 김문근의 본처 연양부부인 이씨는 효간공 이용수의 딸이자 연안 이씨다. 친일파 민영휘의 적장녀는 정관재 이단상의 후손인 정위 이유익(李裕翼)과 결혼 후 이홍재(李弘宰)와 이달재(李達宰)를 낳았으나, 이혼하였다고 한다.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김개남의 첫 번째 부인은 연안 이씨다.[239] 여담으로 김개남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전라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이 부하들에 의해 도망칠 수도 있다며 재판을 거치지 않고 전주 초록 바위에서 목을 베게 했는데, 김개남의 목을 베게 한 전라감사 이도재도 연안 이씨이며, 김개남의 비문을 지은 역사문제연구소장 이이화도 연안 이씨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주시경 선생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서재필의 뒤를 이어 두 번째 한국 출신 의사인 박에스더의 친모가 연안 이씨다.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 의과대학 최연소 입학자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른 부부이기도 하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다. |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 성골장군 호경의 후손이자 고려 태조의 증외고조부인 신천 강씨 보육의 후손 중랑장 강인의 부인이 연안 이씨로 신천 강씨 족보에는 부인 이씨가 당나라에서 온 대장군, 연안후 이무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강인의 아들 정원부사 강세의 부인은 이수산의 여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궁원록에선 강세의 부인 수안 이씨의 아버지가 이수산이 아니라 이인(李仁)으로 기록되어 있고, 부인의 외조부는 연안 이씨 이적(李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인(李仁)은 상술했듯이 이견웅을 시조로 하는 수안 이씨와 다른 계열의 수안 이씨의 시조인데, 이 점에선 이수산과 일치한다. 또한 후대에 만들어진 신천 강씨 족보엔 강세의 부인의 아버지가 이수산이라고 적혀있으므로 이인(李仁)과 이수산이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 의문점이 들 수 있으나 이수산의 처가는 인천 채씨인데, 이인(李仁)의 처가는 연안 이씨이므로 동일 인물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즉, 둘 중 어느 하나가 오기(誤記)라는 것이다. 풍산 홍씨 시조인 홍지경의 손자이자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을 지낸 홍유의 부인이 연안 이씨로 밀직부사 판도상서 이경무의 딸이다. 강릉 유씨 시조 상서도성좌복야 유승비의 어머니가 대호군 이승안의 여식인 연안 이씨이다. 또한 유승비의 아버지는 가정대부 대제학을 지내고,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령에 증직된 유연이다. 충숙왕 원년에 태어난 광산 김씨 양간공파 중 판군기감사공파의 파조 김영리의 장모가 연안 이씨이다. 김영리 처 남양군부인의 어머니이자 봉성대부 선공부령 홍승연의 처인 연안군부인은 1256년에 태어난 통헌대부 밀직부사 민부전서 이득량의 여식이다. 즉 홍승연의 처 연안군부인은 밀직부사공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연안군부인의 아들은 문하시중 남양백 홍영통이며 홍영통의 조부는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양순공 홍경, 증조부는 충선왕 배향공신으로 벽상삼한진충동덕좌리공신 경흥군 개국후에 봉해지고,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된 충정공 홍자번이다. 외에도 김영리의 아들인 광성군 김정의 처도 미확인 6개 파 중 전법판서공파 중시조 이방[229]의 여식인 숙신택주 연안 이씨다. 또한 김정의 손자인 김원우의 처도 연안 이씨이나 역시 파계 미상이다. 영해 박씨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박회의의 부인이 연안군부인 연안 이씨로 밀직부사 이득량의 딸이다. 참고로 연안군부인의 아들이 최씨 정권을 타도한 대장군 박송비다. 박송비는 이 공으로 위사공신이 되어 수사공 좌복야와 참지정사 등 요직을 지냈다. 문의 박씨의 시조 박의중의 초배가 26세에 졸한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로 이수창의 삼녀이다.[233] 박의중은 경명왕의 아들 밀성대군의 17세손이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성과 직제학 등을 지내고, 1388년에 명나라에 들어가 철영위(鐵嶺衛)의 철폐(撤廢)를 교섭하고 돌아와 창왕 때 공신이 되었다. 후에 예문관 제학 겸 대사성을 지내고, 1392년에 고려사를 수찬하고 검교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박의중과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 사이에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박연은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공민왕 때 등과하여 정사공신, 정당문학, 대제학을 지냈고, 둘째 아들 박행도 공민왕 때 우상을 역임했다.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의 손자이자 박행의 아들 박녕은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던 두문동 칠십이현 중 한 명이다.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적장자이자 신덕왕후의 친오빠인 재령 강씨의 시조 안릉부원군 안정공 강득룡의 부인이 연안군 이엄의 딸인 연안군부인이다. 여담으로 강득룡은 고려 대에 삼사우사, 삼중대광 첨의정승 등을 지냈다. 공산 안씨 시조이자 고려 말기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조선이 건국되자 참찬문하부사에 오른 정평공 안익의 부인이 문청공 이계손의 딸인 연인 이씨다. 또한 안익의 아들인 병마절도사 안습의 부인도 이계손의 손녀이자 이량의 딸인 연안 이씨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을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오른 동원군 정평공 함부림의 후배가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함부림의 족보에 의하면 연안 이씨 부인의 아버지가 연성군 이명조(李命祖) 또는 호부상서 이상준(李尙俊)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연안 이씨 파계에선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다.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의 어머니가 좌의정 이귀령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다. 정경부인 이씨의 남편이자 의정궁주의 아버지 조뢰는 돈녕부지사를 지냈고, 조부는 조선 개국공신 한산군 조인옥,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조돈이다. 참고로 태종과 의정궁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중종 때 정권을 집권한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남곤의 처가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정경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숙천부사를 지낸 이세웅인데 여기서 이세웅이 바로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증손자이다. 즉 정경부인 이씨는 현존하지 않는 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남곤과 정경부인 이씨 사이에선 아들은 없고 딸만 3명이었다. 공조정랑과 순천군수 등을 지낸 임류의 처 연안 이씨 부인은 예부상서 이해의 후손이다. 임류의 묘표에 기록되어 있기를 연안 이씨 부인은 이비의 여식이며, 판사재감사·지문주사 이을수의 손녀, 예부상서와 밀직사사를 지낸 이해의 증손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임류의 처 연안 이씨 부인은 예부상서공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표적 피난기로 꼽히는 쇄미록을 남긴 선비 오희문의 부인이 연안 이씨다. 명재상으로 꼽히는 영의정 오윤겸의 어머니이며,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또한 오희문 처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이정수인데 이정수의 장인이 바로 성종의 서자 익양군이다. 이정수는 익양군의 차녀 이계환과 결혼하여 오희문의 처 연안 이씨를 낳은 것이다. 징비록을 기록한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조모가 이형례의 딸인 연안 이씨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토사 이정암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한 충정공 김덕함의 어머니는 파계를 고증할 수 없는 연안 이씨이다. 어머니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우부장 이윤공(李胤公)으로 조부는 후릉참봉 이정생(李廷生)이며, 증조부는 홍문관직제학 이삼산(李三産)[234]이다. 여담으로 김덕함은 1636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혼인하여 영안위에 봉해진 홍주원의 어머니는 이정구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국영 등이 후손이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이자 우의정 강석기의 삼녀가 이정구의 손자이자 비변사당상 이소한의 아들인 이홍상의 부인이다. 인현왕후의 오빠 예조판서 민진후의 선처가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 인천부사 이단상의 딸이며 후처는 현감 이덕로의 딸로 같은 연안 이씨다. 특히 후처 소생 민익수가 바로 명성황후의 고조부가 된다. 여담이지만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외할아버지도 연안 이씨인 연원부원군 해고 이광정이다. 인경왕후의 숙모는 형조판서 이은상의 딸인데,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인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지은 양관 대제학 김만중의 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가 판서 이은상의 딸이기 때문이다. 또 인경왕후의 조카가 노론의 영수였던 이천보이기도 한데 이천보의 어머니 광산 김씨가 김만기의 삼녀로 이천보의 어머니는 인경왕후의 여동생이 된다. 즉 인경왕후의 숙모도 연안 이씨, 조카도 연안 이씨라는 것이다. 인현왕후의 새언니도 연안 이씨인데 숙종의 정비였던 3명 중 2명이 연리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채제공의 어머니 정경부인 이씨는 연안 이씨다. 정경부인 이씨는 18세의 나이 때 혼서와 택일단자까지 받은 상태에서 결혼하려고 하던 남편이 혼례를 치르기 직전에 급사하여 과부가 될 뻔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경부인 이씨는 당시 예조판서에게 용기 있게 사정하여 당시에 흔하지 않게 왕명[235]으로 재혼을 허락받았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한 조만영의 아들이자 이조·예조판서를 지낸 조병구의 처가 정부인 연안 이씨다. 조병구는 신 안동 김씨와 세력 다툼을 벌이는데 앞장섰으며, 삼촌인 조인영이 영의정에 오르자 합세하여 정치 세력을 키운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다.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는 연안 이씨인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하였다. 개화파의 시조인 우의정 박규수의 부인이 연안 이씨다. 박규수는 평안도관찰사를 지낼 당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자 거부하며 이현익을 시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이현익을 침임자로 오해하여 이현익을 붙잡고, 무장하여 도발하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236] 철인왕후의 모친이자 안동 김씨 세도가 김문근의 본처 연양부부인 이씨는 효간공 이용수의 딸이자 연안 이씨다. 친일파 민영휘의 적장녀는 정관재 이단상의 후손인 정위 이유익(李裕翼)과 결혼 후 이홍재(李弘宰)와 이달재(李達宰)를 낳았으나, 이혼하였다고 한다.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김개남의 첫 번째 부인은 연안 이씨다.[239] 여담으로 김개남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전라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이 부하들에 의해 도망칠 수도 있다며 재판을 거치지 않고 전주 초록 바위에서 목을 베게 했는데, 김개남의 목을 베게 한 전라감사 이도재도 연안 이씨이며, 김개남의 비문을 지은 역사문제연구소장 이이화도 연안 이씨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주시경 선생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서재필의 뒤를 이어 두 번째 한국 출신 의사인 박에스더의 친모가 연안 이씨다.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 의과대학 최연소 입학자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른 부부이기도 하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다. |